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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산'(으)로 총 366 개의 검색결과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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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고행(苦行)은 작복지원(作福之源) 인욕(忍辱)은 수덕지본(修德之本)   * 조상(祖上)의 영(靈) 산천(山川)의 영(靈) 외가(外家)의 영(靈) 은 그물과 같이 전생(前生)에서 금생(今生)으로 넘어오는 자신의 영(靈)을 저항하여 걸러낸다. 그걸 이겨 내려면 워낙 강한 영력(靈力)을 갖춰야 하는데 전생(前生)에 이미 닦은 것이 대개가 다 부딪혀 없어지고 유독 집중적으로 공부한 것만 남아날 수 있다.   * 지(地): 땅도 수명이 있다. 360×30=10,800 (1회(會)) 30은 한달 36×3=108→초기수(初起數) 3은 3재(才) 12회(會)=360×360=1원(元)=지구의 일겁=4회(會) 진,술,축,미4고장으로 129,600×129,600=16,796,160,000 16,796,160,000×4=67,184,640,000=1갑(甲)→지구의 생명(生命)   물이 자방(子方)→묘방(卯方)→오방(午方)→유방(酉方)으로 간다(90˚로 돌아감) 다시 북방으로 갈 땐 남방에 화산(火山)이 많아진다. 그리하여 1갑(甲)이 끝나면 지구 생명이 끝나고 다시 불덩이로 된다. 1갑(甲)이 끝 난후 그 불덩이가 다시 1갑이 지나면 지구로 환원한다.   그 불덩이 속엔 물이 내재(內在)하는데 그것이 팽창하면 다시 지구가 생(生)해지는 것이다. →화(火)는 수(水)로 화(化)하고 수(水)는 화(火)로 화(化)하기 때문에 화중지수(火中之水)는 팽창된다. 곧 이것이 주역(周易)의 원리이다.   물이 지구를 싸고 있다가 식으면 지구가 생겨나게 되고 만물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불→지구→물 ~ 물→지구→불 이 되는데 소요되는 기간이 1갑이다. 전기는 물에서 나온 것이다 (본래) ― 물속에서 왕래가 없고 물이 다 전기로 화(化)하고 땅속에서 만이 왕래가 있다.   뢰: 동(動) ↑ 수뢰둔(水雷屯): 물속에 있는 우뢰는 용사가 되지 않는다. ↓ 수: 험(險)   * 이동감서(離東坎西)→ 일출동(日出東) 월출서(月出西)하여 월사동(月死東)이라. 이남감북(離南坎北)→ 지구의 생명은 남쪽에서 끝남 . 불의 생명은 북쪽에서 끝남 후천팔괘(後天八卦)   물은 불이 없으면 힘을 못쓴다. 물은 강(剛) 불은 유(柔)   땅은 8곤지(坤地)에 4진뢰(震雷)에 가(加)해지면 천근(天根)이 된다. 봄은 1년의 머리, 8괘는 64괘의 첫머리이다. 36수가 도시(都是) 64괘(卦)의 첫머리이다.   하늘은 182°반 땅도 182°반 → 음도 양도가 각 182도반 지상(地上)에 있는 하늘은 양도(陽道)→지상만물(地上萬物)조직 지하(地下)에 있는 하늘은 음도(陰道)   * 지상 36° 태양계― 태양광명계 북극(北極)→북두칠성(北斗七星) 지하 36° 유음계 ― 남두육성(南斗六星)→우주를 이룩함 ―남극(南極) 상하의 하늘이 통즉(通則) 지구의 만물이 화생(化生)한다   *남두육성(南斗六星) 분야에 가면 어두운 하늘이 있다.(지하36°) 태양계(太陽界)는 밝은 하늘이다. 천문(天文)에는 지하 36°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   북(北):감북(坎北)분야→두성(斗星) 7에 90° 구로주 동(東)은 승신주 → 각성분야(진동(震動)분야)→ 한국,일본이 해당됨 남(南)은 섬부주→ 이위화(離爲火) 정성분야 서(西)은 우화주 90° 규성분야(규성7성분야)   지구(地球)위는 광명세계(光明世界) 지구(地球)아래는 암흑세계(暗黑世界) 지상(地上) 36°는 지구상(地球上)에서 가능한곳 지하(地下) 36°는 지구상(地球上)에서 불가능(不可能)한곳.   인공위성은 지구 중심으로 회전하는데 우리가 살고 있는 반대편은 모르고 있다. 곧 태양(太陽)을 중심(中心)하여 도는 반대편의 암흑천(暗黑天)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일천풍구(一天風姤),뇌지예雷地豫),지뢰복(地雷復),풍천소축괘(風天小畜卦)로 파악키로 요(要)함 우레(雨雷)가 지상(地上)에 출(出)하는 것이 뇌지예(雷地豫) 음전(陰電)이 지하(地下)로 입(入)하는 것이 지뢰복(地雷復)이다.   *기 삼백 360°×360리(里)=129,600리(里)(지구둘레) 태양(太陽): 4×9=36 360리(里)×240°=86,400리(里)(달 둘레) 태음(太陰):4×6=24 360×360×29(월력(月曆))=3,658,400 달에서 지구까지의 거리 공전   365°1/4×365°1/4×365°1/4 = 해~지구까지 거리 = 태양둘레 365°1/4×365°1/4×365°1/4×365°1/4 = 태양광명 유성계(遊星界)의 이수(里數) 365°1/4×365°1/4×365°1/4×360 = 태양암흑 유성계(遊星界)의 이수(里數)   * 태양사선(太陽斜線)을 따라오는 태음(太陰)의 인력(引力)과 지중고열(地中高熱)이 물을 끓여 거기에 증발되어 밀어 올리는 인력(引力), 곧 땅속에서 밀어 올리는 추진력(推進力) 때문에 지구가 회전하며 또한 지구(地球)의 생명(生命)이 존속한다.   지상(地上)의 불(태양(太陽)), 지하(地下)의 불(지중고열(地中高熱))→지구(地球)의 존속이유 지구가 모두 물이 되면 사람만 없어지고 (멸함), 다 불로 화(化)하게 되면 모든 생물(生物)이 멸한다.(전멸(全滅)). 지구 전체가 불덩이에서 물로 화(化)하게(전체가) 되기까지의 기간이 3겁이다.   바다로 (전체가) 화(化)한데서 다시 불덩이로 화(化)하게 되기 까지의 기간도 3겁이다.   인구(人口) 개벽운 ― 129,600년만에 오고 인종(人種) 개벽운 ― 진(辰),사(巳),오(午) 3회에 온다. 곧 못쓸 인간이 다 멸한다.   * 해의 영향력에도 지구 궤도을 9만층 계열(129,600리)에서 물이 벗어나지 않고 무중력(無重力) 상태를 향해 떨어지지 않고 균형 속에 고정되어 땅까지 함께 따라 돌게 된다.   *귀곡자(鬼谷子) ― 땅아래 화성(火火星) 수성(火水性) 이 있다. 땅위엔 화성(형혹성)이 있다. 곧 천존지비(天尊地卑)하니 지재기중(地在其中)이라. 귀곡자는 자하문인(子夏門人)이다. 귀족자의 자하전(子夏傳)이 진주역(眞周易)이다.   * 인간(人間)은 형(形) +체(體)로 이루어짐 우주인(宇宙人)은 형(形)만 있고 체(體)가 없다. 귀신(鬼神)은 무형(無形)이다.   * 흉기(凶(氣) ― 병균이 뭉쳐 들어오는 것. 까마귀는 그 기(氣)를 본다.   * 관(몽각관(夢覺管)) : 관을 건너면 깨닫는다. 영혼이 짐승의 뱃속을 거치면 영(靈)대가 남아있고 인간의 배속을 거치면 영(靈)대가 남아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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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산학(仁山學)의 정수, 神藥 자죽염 개발 인산선생 직제자로 가르침 실현에 앞장 / 인산 직제자 주경섭 선생                     죽염은 민간의학의 하나로 오랜 옛날부터 전해져 왔지만 명의이자 독립운동가였던 고(故) 인산 김일훈(1909~1992) 선생이 만드는 방법을 체계화하고 약효의 원리를 처음 밝혀, 죽염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고 인산선생은 ‘민초들의 의황(醫皇)’이라 불릴 정도로 신기의 의술로 수많은 사람들을 구했고, 타고난 예지력으로 천지만물의 음양오행 원리와 약리작용에 통달한 도인이었다.   어릴 때부터 믿기 어려울 정도로 총명했던 선생은 네 살 때 한글을 떼고 한글이 음양오행의 원리에 따라 창제됐음을 간파했으며, 옥편을 다 외우고 한문본 삼국지와 당시(唐詩), 두보의 시와 《강희자전》을 차례로 독파했다.   일곱 살 때 비가 갠 하늘의 오색 무지개를 보고 우주의 비밀과 약리작용의 이치를 깨달아 병으로 숨져가는 이웃 환자들을 구제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열여섯 살 때 의주에서 횡포를 일삼던 일본인 청년들을 때려눕히고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투신한 선생은 항일투쟁의 영웅 변창호 선생의 모화산부대에 들어가 항일전투에 참가했으며, 일제의 추적을 피해 러시아와 묘향산 등을 떠돌면서 병자들을 치료했다.   스물여섯 살 때 일본경찰에 체포돼 춘천형무소에서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탈옥, 묘향산에 들어가 자신이 창안한 인산쑥뜸법으로 건강을 되찾았다. 이후 묘향산, 의주 천마산 등에서 당대의 선지식이었던 송만공, 김수월, 하동산, 방한암 스님들과 교유했다.     해방 후 선생은 서울로 올라왔으나 이승만 대통령에게 자신의 뜻과 충정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속세를 버리고 다시 입산한다. 공주 마곡사, 계룡산, 전북 남원과 운봉 등을 거쳐 1957년 경남 함양 삼봉산 자락 살구쟁이마을에 자리 잡고 인산초당을 지은 후 전국에서 몰려든 수많은 환자들에게 기적과 같은 인술을 펼쳤다. 《우주와 신약》, 《구세신방》, 《신약》 등의 명저를 저술한 후 선생은 노구를 이끌고 전국을 돌며 공개강연회를 열고 제자들을 키워 내면서 자신이 깨달은 만물의 약리작용을 세상에 전하다, 지난 1992년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의황(醫皇) 인산선생께 7년간 직접 사사         인산선생의 직제자로 그 가르침의 정수를 이어받았고,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현재까지 개발된 죽염으로는 최고의 경지인 자죽염을 처음 개발한 이가 바로 도해(주) 대표이사 겸 도해한의원 원장인 도해(道海) 주경섭씨다.   도해라는 호도 선생에게서 사사받은 것이다. 인산선생 못지않게 주경섭 원장도 어릴 때부터 범상치 않은 아이였다. 초등학교 때는 UFO에 빠져 지냈고 중학교 때는 소설 《단(丹)》의 주인공인 고(故) 봉우 권태훈 선생의 사상에 심취해 봉우 선생의 만수한의원에 드나들며 단전호흡을 배웠다. 일곱 살 위 작은형과 늘 함께였다. 또 ‘옴’을 염하면 그 진동으로 물의 파장이 변한다고 주장하는 안동민 선생에게 심령과학을 배우기도 했다. 그렇게 학교공부와는 담을 쌓고 정신세계에 팔려 지내다, 중학교 졸업 후 본격적인 공부를 위해 형과 함께 강원도 깊은 산골짜기에 들어박혀 2년간 선도수련을 했다. 한국전쟁 중에도 난리가 난 줄 몰랐다는 심심산골 오지인 철암 근처 7가촌이라는 곳이었다.   둘이서 한 달 생활비 1만원으로 벼텼다. 양초가 아까워 관솔불을 밝히기도 했고 간첩으로 오인 받아 경찰이 출동하기도 했지만 새벽마다 바위에 앉아 수련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아 도인형제로 소문났다. 그러던 중 불교신문 김윤세 기자가 소문을 듣고 취재차 찾아온다. 바로 인산선생의 둘째아들이며 현재 (주)인산가 대표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함양에 있는 인산선생을 찾아가보는 게 어떠냐고 권한다. 물론 자기 아버지라는 것은 말하지 않았다. 이렇게 열여덟 살 때 인산선생을 처음 뵙고 문하에 들어갔으나 2년 동안 막노동만 했다. 톱과 삽 한 자루만으로 아람들이 나무를 베어내고 산을 통째로 개간하는데 일주일에 리어카가 하나씩 부서지는 중노동이었다. 저녁이 되면 형제가 서로 몸을 골고루 밟아줘야 근육이 풀릴 정도였다. 이런 사정은 까맣게 모르고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선생의 의술을 배우기 위해 몰려왔다. 당연히 모두들 며칠 버티지 못했다. 한번 척 보면 저 사람은 5일짜리, 저 사람은 일주일짜리 하고 감이 오는데 카운트해 보면 틀림이 없었다고 한다. “마치 죽을 것처럼 힘든 나날이었지만 이상하게 육체가 힘들수록 번뇌와 망상은 말끔히 사라지는 겁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이 돈 주고도 배울 수 없는 산교육이었습니다” 그렇게 배워서인지 주 원장도 신입직원에게 3달 동안 장작 패는 노동만 시킨다. 그렇게 3달을 버틴 사람만 정식직원으로 채용, 일을 가르친다. 그렇게 중노동만 하던 어느 날, 강연 차 서울에 간 선생을 따라나선 길이었다. 뷔페식당에서 주 원장을 불러 곁에 앉힌 선생이 “다들 떠났는데 이놈들만 버텼어” 라며 손을 잡고 “이젠 질문해라. 궁금한 걸 물어봐라” 하시는 게 아닌가. 그때부터야 주 원장은 선생의 의술 개념을 하나하나씩 배워나갔다. 메모로는 모자라서 녹음기로 스승의 말씀을 녹취했다. 그렇게 모은 엄청난 양의 자료를 주 원장은 모두 도해닷컴(www.dohae. com)에 올려놓아 누구든 볼 수 있게 했다. 의술을 독점하지 말라는 선생의 가르침을 받들기 위해서다.         최초로 자죽염 개발, 완성 아직도 멀었다   주 원장은 1990년 6월 인산선생으로부터 도해라는 호를 사사받고 죽염, 사리장, 오핵단, 유황오리 등 신약의 비법을 전수받았다.   1992년 선생 사후 그 가르침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지난 17년간 매진하고 있다. 주 원장은 “저는 인산선생의 가르침을 현실화시키려는 사람입니다”라며 “인산학이 어렵다고들 하지만 조금만 노력하면 실현할 수 있습니다”라고 밝혔다. 또 “인산의학이 아니라 인산학이라 불러야 합니다. 의학뿐만 아니라 철학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라고 강조했다. 인산가에서 독립해 나온 주 원장은 죽염 연구에 홀로 정진했다. 인산선생도 생전에 방법은 알고 있었으나 만들지는 못한 자죽염 개발에 매달린 것이다. 관건은 온도였다. 어느 날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러시아의 밀가루 공장이 폭발했다는 뉴스를 보고 착안, 단순히 불을 때는 게 아니라 장작불에 송진가루를 뿌려 폭발시키는 방식을 도입함으로써, 마지막 9번째 구울 때 온도를 2000도 넘게 올리는 게 가능해졌다. 또 고열에도 녹지 않고 견디는 철제 노를 만들기 위해 숱한 주물공장을 뒤지며 용접도 직접 배웠고, 노의 설계도 수백 번 바꿔가며 실험을 거듭했다. 이런 각고의 노력 끝에 1993년 마침내 자죽염이 탄생한다. 죽염은 인체의 거의 모든 질병에 대한 예방 및 치료효과가 탁월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노화와 발암물질의 활동을 완화시켜 주고, 보음·보양효과와 갖가지 공해 독을 풀어주는 힘도 뛰어나다고 한다. 소금물에 못을 담가 두면 벌겋게 녹이 슬지만 죽염에 담근 못은 전혀 슬지 않고 기존에 있던 녹마저 떨어진다. 죽염의 환원력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산화력이 크다는 것은 건강에 해롭다는 것이고 환원력이 크다는 것은 인체에 이롭다고 해석할 수 있거든요. 질병의 예방과 치료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환원력입니다. 자죽염은 최고의 환원력을 가진 식품입니다” 진시황이 찾던 불로장생의 묘약은 유황으로 만든 금단이었으나 금단은 실제로 만들 수 없다. 자죽염은 금단 성분인 유황정 기운이 합성돼 젊음을 유지해 주며, 유해산소를 환원시키는 힘이 있다.     하지만 자죽염이 죽염의 완성단계는 아니다. 완성으로 가는 과정일 뿐이다. 인산선생은 온도를 5000도까지 올리는 것을 최종 목표로 삼았다. 지금은 2400도로 자죽염을 생산하지만, 5000도가 되면 소금이 황금빛 덩어리가 될 수도 있다. 주 원장은 “죽염은 소금이 아닙니다. 물질 자체가 완전히 다릅니다. 소금은 산성이지만 죽염은 약 알칼리성입니다”라며 “보통 천일염 10톤에 죽염은 1톤도 안 나옵니다. 녹아서 나오기 전에 다 기화돼서 날아가므로, 온도뿐만 아니라 그것도 고민입니다”라고 설명했다.     “인산학은 대체의학에 구속되는 것 아냐” 생전에 인산선생은 “죽염이 만병통치약이긴 하지만 ‘다스릴 통(統)’자가 아니라 ‘통할 통(通)’자를 써야 하느니라”라고 가르쳤다. 만병을 다 낫게 하는 게 아니라 만병에 두루 통한다는 뜻일 터이다. 주 원장이 운영하는 도해(주)에서는 프리미엄 죽염과 자죽염을 생산 판매하고 있다.     또 배엿, 밭마늘엿, 오리양엿, 황토밭마늘, 홍화씨, 사리장, 무엿 등 다양한 건강식품들을 개발해 생산중이다.     특히 유황오리와 개, 염소, 닭 등으로 만든 오핵단은 암치료제로 이미 개발돼 있다. 주 원장은 “도해는 인산선생의 정신을 계승한 자죽염 전문 기업입니다”라며 “선생의 정신 그대로 고객의 밥상에 보약을 올리는 마음으로 제품을 생산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선생은 가난한 사람들과 3살 이하 어린아이, 70세 이상 어르신들에게는 돈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또 ‘네가 먹고 마시는 게 죽어가는 사람 호주머니에서 나온 것’이라도 하셨고 ‘절대 도둑놈, 사기꾼, 그리고 장사꾼이 되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는 “인산학은 절대 대체의학에 구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한의학과는 별개로 거대한 근본 뿌리를 두고 있는 학문입니다”라고 강조했다. 또 “지금 하는 것으로도 먹고 사는 데는 충분하지만 인산학의 본류와는 멀어지고 있다는 느낌입니다”라며 “선생의 가르침을 제대로 실현하려면 현실적으로 엄청난 자본이 필요합니다. 국가적 차원에서 인산학에 대한 관심과 지원이 절실합니다”라고 간절한 바램을 피력했다.   취재 / 강승아기자 사진 / 채세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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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ttp://www.idailynews.co.kr/news/15010   인산학(仁山學)의 정수, 神藥 자죽염 개발 인산선생 직제자로 가르침 실현에 앞장 / 인산 직제자 주경섭 선생 죽염은 민간의학의 하나로 오랜 옛날부터 전해져 왔지만 명의이자 독립운동가였던 고(故) 인산 김일훈(1909~1992) 선생이 만드는 방법을 체계화하고 약효의 원리를 처음 밝혀, 죽염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고 인산선생은 ‘민초들의 의황(醫皇)’이라 불릴 정도로 신기의 의술로 수많은 사람들을 구했고, 타고난 예지력으로 천지만물의 음양오행 원리와 약리작용에 통달한 도인이었다. 어릴 때부터 믿기 어려울 정도로 총명했던 선생은 네 살 때 한글을 떼고 한글이 음양오행의 원리에 따라 창제됐음을 간파했으며, 옥편을 다 외우고 한문본 삼국지와 당시(唐詩), 두보의 시와 《강희자전》을 차례로 독파했다. 일곱 살 때 비가 갠 하늘의 오색 무지개를 보고 우주의 비밀과 약리작용의 이치를 깨달아 병으로 숨져가는 이웃 환자들을 구제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열여섯 살 때 의주에서 횡포를 일삼던 일본인 청년들을 때려눕히고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투신한 선생은 항일투쟁의 영웅 변창호 선생의 모화산부대에 들어가 항일전투에 참가했으며, 일제의 추적을 피해 러시아와 묘향산 등을 떠돌면서 병자들을 치료했다. 스물여섯 살 때 일본경찰에 체포돼 춘천형무소에서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탈옥, 묘향산에 들어가 자신이 창안한 인산쑥뜸법으로 건강을 되찾았다. 이후 묘향산, 의주 천마산 등에서 당대의 선지식이었던 송만공, 김수월, 하동산, 방한암 스님들과 교유했다. 해방 후 선생은 서울로 올라왔으나 이승만 대통령에게 자신의 뜻과 충정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속세를 버리고 다시 입산한다. 공주 마곡사, 계룡산, 전북 남원과 운봉 등을 거쳐 1957년 경남 함양 삼봉산 자락 살구쟁이마을에 자리 잡고 인산초당을 지은 후 전국에서 몰려든 수많은 환자들에게 기적과 같은 인술을 펼쳤다. 《우주와 신약》, 《구세신방》, 《신약》 등의 명저를 저술한 후 선생은 노구를 이끌고 전국을 돌며 공개강연회를 열고 제자들을 키워 내면서 자신이 깨달은 만물의 약리작용을 세상에 전하다, 지난 1992년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의황(醫皇) 인산선생께 7년간 직접 사사 인산선생의 직제자로 그 가르침의 정수를 이어받았고,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현재까지 개발된 죽염으로는 최고의 경지인 자죽염을 처음 개발한 이가 바로 도해(주) 대표이사 겸 도해한의원 원장인 도해(道海) 주경섭씨다. 도해라는 호도 선생에게서 사사받은 것이다. 인산선생 못지않게 주경섭 원장도 어릴 때부터 범상치 않은 아이였다. 초등학교 때는 UFO에 빠져 지냈고 중학교 때는 소설 《단(丹)》의 주인공인 고(故) 봉우 권태훈 선생의 사상에 심취해 봉우 선생의 만수한의원에 드나들며 단전호흡을 배웠다. 일곱 살 위 작은형과 늘 함께였다. 또 ‘옴’을 염하면 그 진동으로 물의 파장이 변한다고 주장하는 안동민 선생에게 심령과학을 배우기도 했다. 그렇게 학교공부와는 담을 쌓고 정신세계에 팔려 지내다, 중학교 졸업 후 본격적인 공부를 위해 형과 함께 강원도 깊은 산골짜기에 들어박혀 2년간 선도수련을 했다. 한국전쟁 중에도 난리가 난 줄 몰랐다는 심심산골 오지인 철암 근처 7가촌이라는 곳이었다. 둘이서 한 달 생활비 1만원으로 벼텼다. 양초가 아까워 관솔불을 밝히기도 했고 간첩으로 오인 받아 경찰이 출동하기도 했지만 새벽마다 바위에 앉아 수련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아 도인형제로 소문났다. 그러던 중 불교신문 김윤세 기자가 소문을 듣고 취재차 찾아온다. 바로 인산선생의 둘째아들이며 현재 (주)인산가 대표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함양에 있는 인산선생을 찾아가보는 게 어떠냐고 권한다. 물론 자기 아버지라는 것은 말하지 않았다. 이렇게 열여덟 살 때 인산선생을 처음 뵙고 문하에 들어갔으나 2년 동안 막노동만 했다. 톱과 삽 한 자루만으로 아람들이 나무를 베어내고 산을 통째로 개간하는데 일주일에 리어카가 하나씩 부서지는 중노동이었다. 저녁이 되면 형제가 서로 몸을 골고루 밟아줘야 근육이 풀릴 정도였다. 이런 사정은 까맣게 모르고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선생의 의술을 배우기 위해 몰려왔다. 당연히 모두들 며칠 버티지 못했다. 한번 척 보면 저 사람은 5일짜리, 저 사람은 일주일짜리 하고 감이 오는데 카운트해 보면 틀림이 없었다고 한다. “마치 죽을 것처럼 힘든 나날이었지만 이상하게 육체가 힘들수록 번뇌와 망상은 말끔히 사라지는 겁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이 돈 주고도 배울 수 없는 산교육이었습니다” 그렇게 배워서인지 주 원장도 신입직원에게 3달 동안 장작 패는 노동만 시킨다. 그렇게 3달을 버틴 사람만 정식직원으로 채용, 일을 가르친다. 그렇게 중노동만 하던 어느 날, 강연 차 서울에 간 선생을 따라나선 길이었다. 뷔페식당에서 주 원장을 불러 곁에 앉힌 선생이 “다들 떠났는데 이놈들만 버텼어” 라며 손을 잡고 “이젠 질문해라. 궁금한 걸 물어봐라” 하시는 게 아닌가. 그때부터야 주 원장은 선생의 의술 개념을 하나하나씩 배워나갔다. 메모로는 모자라서 녹음기로 스승의 말씀을 녹취했다. 그렇게 모은 엄청난 양의 자료를 주 원장은 모두 도해닷컴(www.dohae. com)에 올려놓아 누구든 볼 수 있게 했다. 의술을 독점하지 말라는 선생의 가르침을 받들기 위해서다.   최초로 자죽염 개발, 완성 아직도 멀었다 주 원장은 1990년 6월 인산선생으로부터 도해라는 호를 사사받고 죽염, 사리장, 오핵단, 유황오리 등 신약의 비법을 전수받았다. 1992년 선생 사후 그 가르침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지난 17년간 매진하고 있다. 주 원장은 “저는 인산선생의 가르침을 현실화시키려는 사람입니다”라며 “인산학이 어렵다고들 하지만 조금만 노력하면 실현할 수 있습니다”라고 밝혔다. 또 “인산의학이 아니라 인산학이라 불러야 합니다. 의학뿐만 아니라 철학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라고 강조했다. 인산가에서 독립해 나온 주 원장은 죽염 연구에 홀로 정진했다. 인산선생도 생전에 방법은 알고 있었으나 만들지는 못한 자죽염 개발에 매달린 것이다. 관건은 온도였다. 어느 날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러시아의 밀가루 공장이 폭발했다는 뉴스를 보고 착안, 단순히 불을 때는 게 아니라 장작불에 송진가루를 뿌려 폭발시키는 방식을 도입함으로써, 마지막 9번째 구울 때 온도를 2000도 넘게 올리는 게 가능해졌다. 또 고열에도 녹지 않고 견디는 철제 노를 만들기 위해 숱한 주물공장을 뒤지며 용접도 직접 배웠고, 노의 설계도 수백 번 바꿔가며 실험을 거듭했다. 이런 각고의 노력 끝에 1993년 마침내 자죽염이 탄생한다. 죽염은 인체의 거의 모든 질병에 대한 예방 및 치료효과가 탁월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노화와 발암물질의 활동을 완화시켜 주고, 보음·보양효과와 갖가지 공해 독을 풀어주는 힘도 뛰어나다고 한다. 소금물에 못을 담가 두면 벌겋게 녹이 슬지만 죽염에 담근 못은 전혀 슬지 않고 기존에 있던 녹마저 떨어진다. 죽염의 환원력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산화력이 크다는 것은 건강에 해롭다는 것이고 환원력이 크다는 것은 인체에 이롭다고 해석할 수 있거든요. 질병의 예방과 치료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환원력입니다. 자죽염은 최고의 환원력을 가진 식품입니다” 진시황이 찾던 불로장생의 묘약은 유황으로 만든 금단이었으나 금단은 실제로 만들 수 없다. 자죽염은 금단 성분인 유황정 기운이 합성돼 젊음을 유지해 주며, 유해산소를 환원시키는 힘이 있다. 하지만 자죽염이 죽염의 완성단계는 아니다. 완성으로 가는 과정일 뿐이다. 인산선생은 온도를 5000도까지 올리는 것을 최종 목표로 삼았다. 지금은 2400도로 자죽염을 생산하지만, 5000도가 되면 소금이 황금빛 덩어리가 될 수도 있다. 주 원장은 “죽염은 소금이 아닙니다. 물질 자체가 완전히 다릅니다. 소금은 산성이지만 죽염은 약 알칼리성입니다”라며 “보통 천일염 10톤에 죽염은 1톤도 안 나옵니다. 녹아서 나오기 전에 다 기화돼서 날아가므로, 온도뿐만 아니라 그것도 고민입니다”라고 설명했다.   “인산학은 대체의학에 구속되는 것 아냐” 생전에 인산선생은 “죽염이 만병통치약이긴 하지만 ‘다스릴 통(統)’자가 아니라 ‘통할 통(通)’자를 써야 하느니라”라고 가르쳤다. 만병을 다 낫게 하는 게 아니라 만병에 두루 통한다는 뜻일 터이다. 주 원장이 운영하는 도해(주)에서는 프리미엄 죽염과 자죽염을 생산 판매하고 있다. 또 배엿, 밭마늘엿, 오리양엿, 황토밭마늘, 홍화씨, 사리장, 무엿 등 다양한 건강식품들을 개발해 생산중이다. 특히 유황오리와 개, 염소, 닭 등으로 만든 오핵단은 암치료제로 이미 개발돼 있다. 주 원장은 “도해는 인산선생의 정신을 계승한 자죽염 전문 기업입니다”라며 “선생의 정신 그대로 고객의 밥상에 보약을 올리는 마음으로 제품을 생산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선생은 가난한 사람들과 3살 이하 어린아이, 70세 이상 어르신들에게는 돈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또 ‘네가 먹고 마시는 게 죽어가는 사람 호주머니에서 나온 것’이라도 하셨고 ‘절대 도둑놈, 사기꾼, 그리고 장사꾼이 되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는 “인산학은 절대 대체의학에 구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한의학과는 별개로 거대한 근본 뿌리를 두고 있는 학문입니다”라고 강조했다. 또 “지금 하는 것으로도 먹고 사는 데는 충분하지만 인산학의 본류와는 멀어지고 있다는 느낌입니다”라며 “선생의 가르침을 제대로 실현하려면 현실적으로 엄청난 자본이 필요합니다. 국가적 차원에서 인산학에 대한 관심과 지원이 절실합니다”라고 간절한 바램을 피력했다.   취재 / 강승아기자 사진 / 채세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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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산의학 핵산(核散) 복어알 2차 법제.              ※ ※<음성> 폐병 神藥 -생강 법제한 복어알-※ ※   플레이버튼(▶)을 누르시면 경청하실수 있습니다.     내약은 내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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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ttp://www.idailynews.co.kr/news/15010     인산학(仁山學)의 정수, 神藥 자죽염 개발 인산선생 직제자로 가르침 실현에 앞장 / 인산 직제자 주경섭 선생                   죽염은 민간의학의 하나로 오랜 옛날부터 전해져 왔지만 명의이자 독립운동가였던 고(故) 인산 김일훈(1909~1992) 선생이 만드는 방법을 체계화하고 약효의 원리를 처음 밝혀, 죽염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고 인산선생은 ‘민초들의 의황(醫皇)’이라 불릴 정도로 신기의 의술로 수많은 사람들을 구했고, 타고난 예지력으로 천지만물의 음양오행 원리와 약리작용에 통달한 도인이었다. 어릴 때부터 믿기 어려울 정도로 총명했던 선생은 네 살 때 한글을 떼고 한글이 음양오행의 원리에 따라 창제됐음을 간파했으며, 옥편을 다 외우고 한문본 삼국지와 당시(唐詩), 두보의 시와 《강희자전》을 차례로 독파했다. 일곱 살 때 비가 갠 하늘의 오색 무지개를 보고 우주의 비밀과 약리작용의 이치를 깨달아 병으로 숨져가는 이웃 환자들을 구제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열여섯 살 때 의주에서 횡포를 일삼던 일본인 청년들을 때려눕히고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투신한 선생은 항일투쟁의 영웅 변창호 선생의 모화산부대에 들어가 항일전투에 참가했으며, 일제의 추적을 피해 러시아와 묘향산 등을 떠돌면서 병자들을 치료했다. 스물여섯 살 때 일본경찰에 체포돼 춘천형무소에서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탈옥, 묘향산에 들어가 자신이 창안한 인산쑥뜸법으로 건강을 되찾았다. 이후 묘향산, 의주 천마산 등에서 당대의 선지식이었던 송만공, 김수월, 하동산, 방한암 스님들과 교유했다. 해방 후 선생은 서울로 올라왔으나 이승만 대통령에게 자신의 뜻과 충정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속세를 버리고 다시 입산한다. 공주 마곡사, 계룡산, 전북 남원과 운봉 등을 거쳐 1957년 경남 함양 삼봉산 자락 살구쟁이마을에 자리 잡고 인산초당을 지은 후 전국에서 몰려든 수많은 환자들에게 기적과 같은 인술을 펼쳤다. 《우주와 신약》, 《구세신방》, 《신약》 등의 명저를 저술한 후 선생은 노구를 이끌고 전국을 돌며 공개강연회를 열고 제자들을 키워 내면서 자신이 깨달은 만물의 약리작용을 세상에 전하다, 지난 1992년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의황(醫皇) 인산선생께 7년간 직접 사사   인산선생의 직제자로 그 가르침의 정수를 이어받았고,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현재까지 개발된 죽염으로는 최고의 경지인 자죽염을 처음 개발한 이가 바로 도해(주) 대표이사 겸 도해한의원 원장인 도해(道海) 주경섭씨다.   도해라는 호도 선생에게서 사사받은 것이다. 인산선생 못지않게 주경섭 원장도 어릴 때부터 범상치 않은 아이였다. 초등학교 때는 UFO에 빠져 지냈고 중학교 때는 소설 《단(丹)》의 주인공인 고(故) 봉우 권태훈 선생의 사상에 심취해 봉우 선생의 만수한의원에 드나들며 단전호흡을 배웠다. 일곱 살 위 작은형과 늘 함께였다. 또 ‘옴’을 염하면 그 진동으로 물의 파장이 변한다고 주장하는 안동민 선생에게 심령과학을 배우기도 했다. 그렇게 학교공부와는 담을 쌓고 정신세계에 팔려 지내다, 중학교 졸업 후 본격적인 공부를 위해 형과 함께 강원도 깊은 산골짜기에 들어박혀 2년간 선도수련을 했다. 한국전쟁 중에도 난리가 난 줄 몰랐다는 심심산골 오지인 철암 근처 7가촌이라는 곳이었다. 둘이서 한 달 생활비 1만원으로 벼텼다. 양초가 아까워 관솔불을 밝히기도 했고 간첩으로 오인 받아 경찰이 출동하기도 했지만 새벽마다 바위에 앉아 수련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아 도인형제로 소문났다. 그러던 중 불교신문 김윤세 기자가 소문을 듣고 취재차 찾아온다. 바로 인산선생의 둘째아들이며 현재 (주)인산가 대표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함양에 있는 인산선생을 찾아가보는 게 어떠냐고 권한다. 물론 자기 아버지라는 것은 말하지 않았다. 이렇게 열여덟 살 때 인산선생을 처음 뵙고 문하에 들어갔으나 2년 동안 막노동만 했다. 톱과 삽 한 자루만으로 아람들이 나무를 베어내고 산을 통째로 개간하는데 일주일에 리어카가 하나씩 부서지는 중노동이었다. 저녁이 되면 형제가 서로 몸을 골고루 밟아줘야 근육이 풀릴 정도였다. 이런 사정은 까맣게 모르고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선생의 의술을 배우기 위해 몰려왔다. 당연히 모두들 며칠 버티지 못했다. 한번 척 보면 저 사람은 5일짜리, 저 사람은 일주일짜리 하고 감이 오는데 카운트해 보면 틀림이 없었다고 한다. “마치 죽을 것처럼 힘든 나날이었지만 이상하게 육체가 힘들수록 번뇌와 망상은 말끔히 사라지는 겁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이 돈 주고도 배울 수 없는 산교육이었습니다” 그렇게 배워서인지 주 원장도 신입직원에게 3달 동안 장작 패는 노동만 시킨다. 그렇게 3달을 버틴 사람만 정식직원으로 채용, 일을 가르친다. 그렇게 중노동만 하던 어느 날, 강연 차 서울에 간 선생을 따라나선 길이었다. 뷔페식당에서 주 원장을 불러 곁에 앉힌 선생이 “다들 떠났는데 이놈들만 버텼어” 라며 손을 잡고 “이젠 질문해라. 궁금한 걸 물어봐라” 하시는 게 아닌가. 그때부터야 주 원장은 선생의 의술 개념을 하나하나씩 배워나갔다. 메모로는 모자라서 녹음기로 스승의 말씀을 녹취했다. 그렇게 모은 엄청난 양의 자료를 주 원장은 모두 도해닷컴(www.dohae. com)에 올려놓아 누구든 볼 수 있게 했다. 의술을 독점하지 말라는 선생의 가르침을 받들기 위해서다.         최초로 자죽염 개발, 완성 아직도 멀었다   주 원장은 1990년 6월 인산선생으로부터 도해라는 호를 사사받고 죽염, 사리장, 오핵단, 유황오리 등 신약의 비법을 전수받았다.   1992년 선생 사후 그 가르침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지난 17년간 매진하고 있다. 주 원장은 “저는 인산선생의 가르침을 현실화시키려는 사람입니다”라며 “인산학이 어렵다고들 하지만 조금만 노력하면 실현할 수 있습니다”라고 밝혔다. 또 “인산의학이 아니라 인산학이라 불러야 합니다. 의학뿐만 아니라 철학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라고 강조했다. 인산가에서 독립해 나온 주 원장은 죽염 연구에 홀로 정진했다. 인산선생도 생전에 방법은 알고 있었으나 만들지는 못한 자죽염 개발에 매달린 것이다. 관건은 온도였다. 어느 날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러시아의 밀가루 공장이 폭발했다는 뉴스를 보고 착안, 단순히 불을 때는 게 아니라 장작불에 송진가루를 뿌려 폭발시키는 방식을 도입함으로써, 마지막 9번째 구울 때 온도를 2000도 넘게 올리는 게 가능해졌다. 또 고열에도 녹지 않고 견디는 철제 노를 만들기 위해 숱한 주물공장을 뒤지며 용접도 직접 배웠고, 노의 설계도 수백 번 바꿔가며 실험을 거듭했다. 이런 각고의 노력 끝에 1993년 마침내 자죽염이 탄생한다. 죽염은 인체의 거의 모든 질병에 대한 예방 및 치료효과가 탁월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노화와 발암물질의 활동을 완화시켜 주고, 보음·보양효과와 갖가지 공해 독을 풀어주는 힘도 뛰어나다고 한다. 소금물에 못을 담가 두면 벌겋게 녹이 슬지만 죽염에 담근 못은 전혀 슬지 않고 기존에 있던 녹마저 떨어진다. 죽염의 환원력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산화력이 크다는 것은 건강에 해롭다는 것이고 환원력이 크다는 것은 인체에 이롭다고 해석할 수 있거든요. 질병의 예방과 치료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환원력입니다. 자죽염은 최고의 환원력을 가진 식품입니다” 진시황이 찾던 불로장생의 묘약은 유황으로 만든 금단이었으나 금단은 실제로 만들 수 없다. 자죽염은 금단 성분인 유황정 기운이 합성돼 젊음을 유지해 주며, 유해산소를 환원시키는 힘이 있다. 하지만 자죽염이 죽염의 완성단계는 아니다. 완성으로 가는 과정일 뿐이다. 인산선생은 온도를 5000도까지 올리는 것을 최종 목표로 삼았다. 지금은 2400도로 자죽염을 생산하지만, 5000도가 되면 소금이 황금빛 덩어리가 될 수도 있다. 주 원장은 “죽염은 소금이 아닙니다. 물질 자체가 완전히 다릅니다. 소금은 산성이지만 죽염은 약 알칼리성입니다”라며 “보통 천일염 10톤에 죽염은 1톤도 안 나옵니다. 녹아서 나오기 전에 다 기화돼서 날아가므로, 온도뿐만 아니라 그것도 고민입니다”라고 설명했다.     “인산학은 대체의학에 구속되는 것 아냐” 생전에 인산선생은 “죽염이 만병통치약이긴 하지만 ‘다스릴 통(統)’자가 아니라 ‘통할 통(通)’자를 써야 하느니라”라고 가르쳤다. 만병을 다 낫게 하는 게 아니라 만병에 두루 통한다는 뜻일 터이다. 주 원장이 운영하는 도해(주)에서는 프리미엄 죽염과 자죽염을 생산 판매하고 있다. 또 배엿, 밭마늘엿, 오리양엿, 황토밭마늘, 홍화씨, 사리장, 무엿 등 다양한 건강식품들을 개발해 생산중이다. 특히 유황오리와 개, 염소, 닭 등으로 만든 오핵단은 암치료제로 이미 개발돼 있다. 주 원장은 “도해는 인산선생의 정신을 계승한 자죽염 전문 기업입니다”라며 “선생의 정신 그대로 고객의 밥상에 보약을 올리는 마음으로 제품을 생산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선생은 가난한 사람들과 3살 이하 어린아이, 70세 이상 어르신들에게는 돈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또 ‘네가 먹고 마시는 게 죽어가는 사람 호주머니에서 나온 것’이라도 하셨고 ‘절대 도둑놈, 사기꾼, 그리고 장사꾼이 되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는 “인산학은 절대 대체의학에 구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한의학과는 별개로 거대한 근본 뿌리를 두고 있는 학문입니다”라고 강조했다. 또 “지금 하는 것으로도 먹고 사는 데는 충분하지만 인산학의 본류와는 멀어지고 있다는 느낌입니다”라며 “선생의 가르침을 제대로 실현하려면 현실적으로 엄청난 자본이 필요합니다. 국가적 차원에서 인산학에 대한 관심과 지원이 절실합니다”라고 간절한 바램을 피력했다.   취재 / 강승아기자 사진 / 채세봄기자
    신약의세계자죽염
  • 인산의학=도해 안수.
    인산의학=도해 웅담(熊膽) 오신(자죽염)안수  
    증득의장도해사진첩
  • 이미지 2009년 제8회 인산學 도해 난반 모임.
    2009년 제8회 인산學 난반 오프라인 모임.                                
    증득의장도해사진첩
  • 이미지 2009년 제8회 인산學 난반 모임.
    2009년 제8회 인산學 난반 오프라인 모임.                                
    신약의세계난반/녹반
  • 제8회 인산學 난반 오프라인 모임
    제8회 난반 오프라인 모임 안녕하세요. 회원님들..^^  그동안 오프라인 모음이 뜸했었죠?  난반을 직접 만들어보실 수도 있습니다.  많이 참석해주세요.  일시: 2009년 5월 23일 토요일 오후 3 시~~~ 장소: 도해(주) 본사 (충북 괴산군 청천면 청천리 38-2 전화: 043-832-7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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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산 선생 저서 우주와 신약 발문
                          인산 선생 최초의 저서 우주와 신약 발문(跋文)   1. 작년에 某大學 전임강사로 있는 魯某 學兄이 나에게 이런 권유를 한 적이 있었다. “아버님의 그 깊은 철학사상과 신비의 의술을 책으로 저술케 하시면 좋지 않겠는가?” 하고.   이런 말은 家親의 다른 여러 제자분들 한테서도 누차 들어온 이야기였다. 나도 가친께 이러한 권유를 여러 번 드려보았으나 그때마다 아직은 발표할 단계가 아니라고 하시면서 응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가친의 연세가 70후로 접어들면서부터는 많이 노쇠해지셨고 기억력도 상당히 감퇴되셨다. 72년도 大韓畵報에 神宗哲學 易祕傳을 기획연재하실 때만해도 훌륭한 저서를 남기실 수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이 근래에 와서는 더욱 절실해졌다.   마침 가친의 제자 중에 道詵寺 교무과장으로 있는 朴某 학형이 아버님께서 책을 쓰시면 자기가 전적으로 책을 맡아 발간하겠다고 나섰다.   그리하여 나와 여러 사람들의 권유로 가친께서는 드디어 집필을 시작하셨다.   그런데 가친의 기억력이 많이 감퇴되어 우선 생각나시는 대로 원고를 써나가셨는데 잊어버린 내용도 상당히 많으셨다. 또 연로하신 관계로 남들처럼 조직적인 구성 체계를 잡지 못하신 채 글을 쓰신 거라 원고정리에 있어서 상당히 애로사항이 많았다. 나 자신도 시간에 쫓겨 가친의 원고를 맡겠다는 다른 분들한테 모두 넘겨주고 싶었으나 혹시나 그분들이 가친의 思想을 조금이라도 이해하지 못할 부분이 없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에서 결국 내가 원고를 맡아 정리하기로 하였다. 꾸준히 노력한 결과 두어 달 만에 원고를 정리하여 도선사 박형한테 넘겼다.   그러나 나 자신 韓醫學에는 원래 문외한이고 또한 宇宙論은 동양철학사상에 있어서의 매우 심오한 경지라 菲才淺學인 나로서는 가친의 원고를 정리하는 일이 매우 벅찬 일이었으므로 원고 정리상에 많은 오류가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2. 이 책은 가친께서 평생을 苦究하신 宇宙哲學과 韓醫學의 神祕方을 논술하신 것이다. 人身은 小宇宙體로서 大宇宙와 불가분의 관계이므로 먼저 대우주의 생성과정을 前篇에 설하셨고, 後篇에서는 이를 통한 한방치료법으로서 현대세계의 불치병인 각종 癌과 난치병인 中風· 糖尿· 癩病 ·癲癎 등의 神祕方을 설하셨다.   그러면 이 책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먼저 가친의 略歷(略傳)을 대략 소개한 후 책의 내용에 대해서도 조금 살펴보기로 하겠다.   가친께서는 8세시에 이미 祖父 밑에서 四書三經을 수학하셨고 그 뒤로는 중학 및 대학강의록을 혼자서 자습하셨다. 10세시부터 義州普通學校에서 수학하다가 그 뒤 1924년 16세시에 만주로 건너가 假名을 池乙龍으로 하여 독립운동에 투신, 장백현 모화산(모아산?)부대 대원으로 활약하셨다.   이때부터 파란만장한 가친의 路程이 시작되었다. 일본군경을 피해 다니며 보통학교 및 漢文私塾의 교사로, 때로는 농사꾼`노동자 등으로 활동하기도 하고, 때로는 걸인처럼 산과 들에서 風餐露宿하기를 多飯事처럼 하셨다.   말할 수 없는 역경 속에서도 오직 일념은 조국광복을 위하여 粉骨碎身 노력하시되 그런 중에서도 한의학 및 동양철학에 대하여도 깊이 연구하셨다. 원래 조부께서 儒學者이면서도 漢醫學에 밝으셨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그 영향을 많이 받으셨다.   그리하여 풍찬노숙하며 다니실 때도 집안에 전래되어오던 비방과 혼자서 자득한 신비의 치료법으로 많은 사람들을 병고에서 구해내고는 인사도 주고받을 겨를 없이 종적을 감추는 奇人의 행적을 수없이 남겼다고 한다.   그 뒤 계속 피신 도중 1933년 25세시에 국내파인 변창호 선생과 독립운동을 모의하다 철원경찰서 습격사건으로 인하여 被逮, 강원도 金化警察署에서 6개월간 모진 고문을 당한 뒤 춘천형무소로 옮겨져 2년간 옥고를 치르셨다.   그 뒤 춘천형무소에서 작업도중 탈출, 금강산을 거쳐 묘향산에 은신하고 있다가 1935년 27세시부터 한말의 巨儒 李華西의 연원인 義兵大將 柳毅庵의 문인 充齋 金斗運 선생을 모시고   1945년 해방시까지 독립운동 전개방안과 동지규합 등에 관하여 수시로 숙의하고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학문에 대한 연구토론도 게을리 하지 않으셨다.   8.15해방과 동시에 越南, 民世 安在鴻 선생, 維石 趙炳玉 박사, 尤史 金奎植 박사, 海公 申翼熙 선생 및 李承晩 대통령 등 여러 애국지사와 교유하며 국정을 논의하셨다. 그 뒤 정계에 뜻이 안맞아 시골로 내려가 鷄龍學院 및 漢文私塾의 강사로서 제자양성에 힘쓰기도 하고, 때로는 나무장사를 하며 世事를 잊고 지내기도 하셨다.   6.25 직전부터는 부산에서 한의원을 경영하셨고, 6.25후 다시 상경, 이대통령 등과 종유하며 국정을 논의하였으나 끝내는 이대통령 정부와 뜻이 안맞아 다시 하향, 경남 咸陽 智異山 부근에서 목물장수와 농사꾼으로 세사를 잊고 지내셨다.   4.19의거 이후 이대통령이 하야하자 다시 상경, 聖惠漢醫院의 원장으로서, 高麗漢方綜合病院의 고문으로서 계속 한의학연구와 치료에 몰두하셨고 때로는 한학을 전수하며 제자양성에 힘쓰기도 하면서 오늘에까지 이르셨다. 이 책은 이러한 역경 속을 지나온 뒤 70여년 만에 처음으로 내는 책이니만큼 매우 감회가 깊으시리라 생각된다.   3. 이 책의 특징은 다른 의서와는 달리 醫藥篇에 앞서 宇宙論을 설한 것이라 하겠다. 가친께서는 宇宙와 人體와 醫藥은 불가분의 관계이므로 모두를 함께 밝히지 않으면 훌륭한 의서가 될 수 없다고 하셨다. 나의 愚見으로 보아도 이 책은 의학뿐만 아니라 철학상에 있어서도 주목될만한 매우 독특한 저서라 여겨진다.   먼저 우주론의 일부를 살펴보면 가친께서는 太空· 太虛· 太極을 三素라 하고 太始· 太初 ·太一을 三要라 하여 三素三要之說로 우주의 本體를 설명하셨다. 이를 좀더 詳述해보면 다음과 같다.   太空은 즉 太始로서 理의 元祖이며, 數로는 零點이요, 冲漠無際하며 寂然不動하고 無氣無形, 無色無臭한 眞空의 상태이다. 시간적으로는 太虛에서 우주의 一劫之數인 十二萬九千六百年 이전의 세계이다.   太虛는 즉 太初로서 氣의 元祖이며, 數로는 零點五요, 兆朕無形하며 豁然貫通하고 有氣無形, 有色無臭한 外實內虛의 상태이다. 시간적으로는 太極에서 十二萬九千六百年 이전의 세계이다.   太極은 즉 太一로서 道의 元祖이며, 數로는 一이요, 循環無端하며 自然之有得이요, 有氣有形, 有色有臭한 混沌之中에 陰陽이 未分된 상태이다. 이는 곧 億兆世界의 化成之道며 萬物化生의 근본이다.   이상이 곧 가친의 宇宙論에 대한 일부를 略述해 본 것이다. 老子는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이라 하여 곧 一以前의 세계를 道라 하였고 그 도는 常無爲而無不爲요, 惟愰惟惚하여 惚兮恍兮! 其中有象하고, 恍兮惚兮! 其中有物이라 하여, 無에서 有는 나올 수 없다는 상식을 초월한 無, 곧 無爲는 후천적인 人爲를 거부한 더 본질적인 有爲의 전단계로서 그것이 道임을 설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道眼으로 관조해본 그 도의 모습을 오직 황홀하고 황홀할 뿐이라고 하면서 찬탄을 마지않았다.   가친께서는 노자의 도를 좀더 세분하여 0에서 1까지의 세계를 공간적, 시간적으로 더욱 치밀하게 분석하신 점이 매우 독특하가 하겠다.   그런데 列子의 본체론을 살펴보면 가친의 설과 매우 유사하다. 列子에 曰 “有太易, 有太初, 有太始, 有太素하니 太易者는 未見氣也요, 太初者는 氣之始也요, 太始者는 形之始也요, 太素者는 質之始也라. 氣形質而 具而未相離라. 故로 曰 混淪이니라.” 하였다.   그러나 가친의 본체론에서는 氣臭色形이 具而未相離를 曰太極이라 하고 또 열자와 달리 臭와 色을 설하신 것과 이를 “零(0)→ 零點五(0.5)→ 一(1)→ 二(2)···”로 전개되는 수리적 학설과 우주의 一劫之數를 설하여 우주론을 공간적, 시간적으로 詳論한 것은 매우 과학적인 일면을 지닌 학설이라 하겠다.   宋儒도 ‘無極而太極“이라 하고 태극이전의 0에까지의 세계를 상술하지 못했으며 또한 理氣에 입각한 우주론을 唱導했을 뿐이다.   그런데 가친의 ”論天堂地獄’장 등을 살펴보면 靈空과 靈界를 설하여 이 세계를 淸界와 濁界, 곧 천당과 지옥으로 분설하여 만물의 구성원을 色素라 하고, 그 색소를 합성시켜주는 것이 氣요, 기의 주인공이 靈이라 하였으며, 또한 心은 七神之靈이라 하여 性 靈 精 氣 神 魂 魄의 그림자라 하고 그 七神의 주인이며 核이 靈이라 하셨다.   이상 가친의 우주론을 약간 살펴보았는데 이는 동양철학상에 있어서도 매우 독특한 지위를 점하는 학설이라 하겠다. 4. 본서에서 또 醫藥篇을 살펴볼 때 현대세계에서 불치의 병으로 알려진 각종 癌病治療의 神藥과 천부의 병으로 알려진 癩病治療의 神祕方 및 眼盲者開眼法, 胎中化男· 化女法 등과 50여년 연구의 所産인 五核丹· 竹鹽 등을 이용한 각종 난치병의 독특한 처방은 고금의 어느 의서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祕方들이라 하겠다.   근래에 와서는 서양에서도 동양철학을 깊이 연구하고 있고 또한 한방의학에 대해서도 크게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는 것이 전 세계적인 추세임을 볼 때 우리도 이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있어야 하리라 생각한다. 원래 나의 염원은 이 책을 모두 한글로 논술하여 많은 독자들에게 읽히도록 하고 싶었다.   이를 가친께도 건의해 보았으나 심오한 우주론을 한글로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점이 많다고 하시어 한문체를 그대로 둔 채 되도록 내 나름대로 현대적인 토를 달아 쉽게 읽히기에 노력하였고, 단지 의약편 만은 가친께 상의를 드려 國 漢文 混用體로하여 독자들이 읽기 쉽게 노력하였다.   그러나 나 자신의 학문의 부족함으로 인하여 원고 정리상에 있어서 많은 오류가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江湖諸賢의 叱正과 海諒이 있기를 앙망할 뿐이다.  끝으로 가친께서는 宇宙와 人體와 藥理의 연관성에 대해서 좀더 깊고 자세한 설명을 가하고 또한 잊었던 기억을 되살려 이 책의 未備點을 보충, 보다 더 完壁에 가까운 醫書로 再著述해 보시겠다고 하니 그때 더 좋은 책으로 만들어 볼 것을 독자제현에 약속한다.                                                                                                                                         1980년  6월초에                                                                                                                                          不肖子 侖禹 謹識 * 위의 발문은 본인이 약 30년전 20대 후반에 인산 선생의 최초의 저서인 《宇宙와 神藥》에 대한 후기로 쓴 발문이다.   당시 선친의 한의학 사상과 의약론을 의철학적 관점에서 내 나름대로 객관적으로 써본 것인데, 당시에는 ‘不肖子’라고만 쓰고 내 이름을 밝히지 않았었다.   가친의 저술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감히 자식의 이름을 밝힌다는 것이 쑥스럽기도 하고 독자의 관점에서 자칫 객관성이 없다고 하지 않을까 염려되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나름대로 객관성을 갖고 쓸려고 노력하였고, 많은 세월이 흐른 후에 다시 읽어보는 발문이나  이때 조금 논급한 선친의 의철학사상에 관한 내용에 있어서는 지금도 생각이 크게 변한 바 없다.   이에 이 글을 접해보지 못한 회원님들의 일독을 위해 약간의 한글화 작업과 교정을 보아 그대로 올려놓는다! 후일 생각해보니 비록 선친에 관한 글이라도 작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으면 작자에 있어서 다른 이의 글로 오해받거나 도용되어 역사왜곡이 될 수도 있기에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이라도 이 점 명확히 하기 위해 본인의 이름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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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산 선생 저서 우주와 신약 발문
                          인산 선생 최초의 저서 우주와 신약 발문(跋文)   1. 작년에 某大學 전임강사로 있는 魯某 學兄이 나에게 이런 권유를 한 적이 있었다. “아버님의 그 깊은 철학사상과 신비의 의술을 책으로 저술케 하시면 좋지 않겠는가?” 하고.   이런 말은 家親의 다른 여러 제자분들 한테서도 누차 들어온 이야기였다. 나도 가친께 이러한 권유를 여러 번 드려보았으나 그때마다 아직은 발표할 단계가 아니라고 하시면서 응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가친의 연세가 70후로 접어들면서부터는 많이 노쇠해지셨고 기억력도 상당히 감퇴되셨다. 72년도 大韓畵報에 神宗哲學 易祕傳을 기획연재하실 때만해도 훌륭한 저서를 남기실 수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이 근래에 와서는 더욱 절실해졌다.   마침 가친의 제자 중에 道詵寺 교무과장으로 있는 朴某 학형이 아버님께서 책을 쓰시면 자기가 전적으로 책을 맡아 발간하겠다고 나섰다.   그리하여 나와 여러 사람들의 권유로 가친께서는 드디어 집필을 시작하셨다.   그런데 가친의 기억력이 많이 감퇴되어 우선 생각나시는 대로 원고를 써나가셨는데 잊어버린 내용도 상당히 많으셨다. 또 연로하신 관계로 남들처럼 조직적인 구성 체계를 잡지 못하신 채 글을 쓰신 거라 원고정리에 있어서 상당히 애로사항이 많았다. 나 자신도 시간에 쫓겨 가친의 원고를 맡겠다는 다른 분들한테 모두 넘겨주고 싶었으나 혹시나 그분들이 가친의 思想을 조금이라도 이해하지 못할 부분이 없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에서 결국 내가 원고를 맡아 정리하기로 하였다. 꾸준히 노력한 결과 두어 달 만에 원고를 정리하여 도선사 박형한테 넘겼다.   그러나 나 자신 韓醫學에는 원래 문외한이고 또한 宇宙論은 동양철학사상에 있어서의 매우 심오한 경지라 菲才淺學인 나로서는 가친의 원고를 정리하는 일이 매우 벅찬 일이었으므로 원고 정리상에 많은 오류가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2. 이 책은 가친께서 평생을 苦究하신 宇宙哲學과 韓醫學의 神祕方을 논술하신 것이다. 人身은 小宇宙體로서 大宇宙와 불가분의 관계이므로 먼저 대우주의 생성과정을 前篇에 설하셨고, 後篇에서는 이를 통한 한방치료법으로서 현대세계의 불치병인 각종 癌과 난치병인 中風· 糖尿· 癩病 ·癲癎 등의 神祕方을 설하셨다.   그러면 이 책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먼저 가친의 略歷(略傳)을 대략 소개한 후 책의 내용에 대해서도 조금 살펴보기로 하겠다.   가친께서는 8세시에 이미 祖父 밑에서 四書三經을 수학하셨고 그 뒤로는 중학 및 대학강의록을 혼자서 자습하셨다. 10세시부터 義州普通學校에서 수학하다가 그 뒤 1924년 16세시에 만주로 건너가 假名을 池乙龍으로 하여 독립운동에 투신, 장백현 모화산(모아산?)부대 대원으로 활약하셨다.   이때부터 파란만장한 가친의 路程이 시작되었다. 일본군경을 피해 다니며 보통학교 및 漢文私塾의 교사로, 때로는 농사꾼`노동자 등으로 활동하기도 하고, 때로는 걸인처럼 산과 들에서 風餐露宿하기를 多飯事처럼 하셨다.   말할 수 없는 역경 속에서도 오직 일념은 조국광복을 위하여 粉骨碎身 노력하시되 그런 중에서도 한의학 및 동양철학에 대하여도 깊이 연구하셨다. 원래 조부께서 儒學者이면서도 漢醫學에 밝으셨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그 영향을 많이 받으셨다.   그리하여 풍찬노숙하며 다니실 때도 집안에 전래되어오던 비방과 혼자서 자득한 신비의 치료법으로 많은 사람들을 병고에서 구해내고는 인사도 주고받을 겨를 없이 종적을 감추는 奇人의 행적을 수없이 남겼다고 한다.   그 뒤 계속 피신 도중 1933년 25세시에 국내파인 변창호 선생과 독립운동을 모의하다 철원경찰서 습격사건으로 인하여 被逮, 강원도 金化警察署에서 6개월간 모진 고문을 당한 뒤 춘천형무소로 옮겨져 2년간 옥고를 치르셨다.   그 뒤 춘천형무소에서 작업도중 탈출, 금강산을 거쳐 묘향산에 은신하고 있다가 1935년 27세시부터 한말의 巨儒 李華西의 연원인 義兵大將 柳毅庵의 문인 充齋 金斗運 선생을 모시고   1945년 해방시까지 독립운동 전개방안과 동지규합 등에 관하여 수시로 숙의하고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학문에 대한 연구토론도 게을리 하지 않으셨다.   8.15해방과 동시에 越南, 民世 安在鴻 선생, 維石 趙炳玉 박사, 尤史 金奎植 박사, 海公 申翼熙 선생 및 李承晩 대통령 등 여러 애국지사와 교유하며 국정을 논의하셨다. 그 뒤 정계에 뜻이 안맞아 시골로 내려가 鷄龍學院 및 漢文私塾의 강사로서 제자양성에 힘쓰기도 하고, 때로는 나무장사를 하며 世事를 잊고 지내기도 하셨다.   6.25 직전부터는 부산에서 한의원을 경영하셨고, 6.25후 다시 상경, 이대통령 등과 종유하며 국정을 논의하였으나 끝내는 이대통령 정부와 뜻이 안맞아 다시 하향, 경남 咸陽 智異山 부근에서 목물장수와 농사꾼으로 세사를 잊고 지내셨다.   4.19의거 이후 이대통령이 하야하자 다시 상경, 聖惠漢醫院의 원장으로서, 高麗漢方綜合病院의 고문으로서 계속 한의학연구와 치료에 몰두하셨고 때로는 한학을 전수하며 제자양성에 힘쓰기도 하면서 오늘에까지 이르셨다. 이 책은 이러한 역경 속을 지나온 뒤 70여년 만에 처음으로 내는 책이니만큼 매우 감회가 깊으시리라 생각된다.   3. 이 책의 특징은 다른 의서와는 달리 醫藥篇에 앞서 宇宙論을 설한 것이라 하겠다. 가친께서는 宇宙와 人體와 醫藥은 불가분의 관계이므로 모두를 함께 밝히지 않으면 훌륭한 의서가 될 수 없다고 하셨다. 나의 愚見으로 보아도 이 책은 의학뿐만 아니라 철학상에 있어서도 주목될만한 매우 독특한 저서라 여겨진다.   먼저 우주론의 일부를 살펴보면 가친께서는 太空· 太虛· 太極을 三素라 하고 太始· 太初 ·太一을 三要라 하여 三素三要之說로 우주의 本體를 설명하셨다. 이를 좀더 詳述해보면 다음과 같다.   太空은 즉 太始로서 理의 元祖이며, 數로는 零點이요, 冲漠無際하며 寂然不動하고 無氣無形, 無色無臭한 眞空의 상태이다. 시간적으로는 太虛에서 우주의 一劫之數인 十二萬九千六百年 이전의 세계이다.   太虛는 즉 太初로서 氣의 元祖이며, 數로는 零點五요, 兆朕無形하며 豁然貫通하고 有氣無形, 有色無臭한 外實內虛의 상태이다. 시간적으로는 太極에서 十二萬九千六百年 이전의 세계이다.   太極은 즉 太一로서 道의 元祖이며, 數로는 一이요, 循環無端하며 自然之有得이요, 有氣有形, 有色有臭한 混沌之中에 陰陽이 未分된 상태이다. 이는 곧 億兆世界의 化成之道며 萬物化生의 근본이다.   이상이 곧 가친의 宇宙論에 대한 일부를 略述해 본 것이다. 老子는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이라 하여 곧 一以前의 세계를 道라 하였고 그 도는 常無爲而無不爲요, 惟愰惟惚하여 惚兮恍兮! 其中有象하고, 恍兮惚兮! 其中有物이라 하여, 無에서 有는 나올 수 없다는 상식을 초월한 無, 곧 無爲는 후천적인 人爲를 거부한 더 본질적인 有爲의 전단계로서 그것이 道임을 설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道眼으로 관조해본 그 도의 모습을 오직 황홀하고 황홀할 뿐이라고 하면서 찬탄을 마지않았다.   가친께서는 노자의 도를 좀더 세분하여 0에서 1까지의 세계를 공간적, 시간적으로 더욱 치밀하게 분석하신 점이 매우 독특하가 하겠다.   그런데 列子의 본체론을 살펴보면 가친의 설과 매우 유사하다. 列子에 曰 “有太易, 有太初, 有太始, 有太素하니 太易者는 未見氣也요, 太初者는 氣之始也요, 太始者는 形之始也요, 太素者는 質之始也라. 氣形質而 具而未相離라. 故로 曰 混淪이니라.” 하였다.   그러나 가친의 본체론에서는 氣臭色形이 具而未相離를 曰太極이라 하고 또 열자와 달리 臭와 色을 설하신 것과 이를 “零(0)→ 零點五(0.5)→ 一(1)→ 二(2)···”로 전개되는 수리적 학설과 우주의 一劫之數를 설하여 우주론을 공간적, 시간적으로 詳論한 것은 매우 과학적인 일면을 지닌 학설이라 하겠다.   宋儒도 ‘無極而太極“이라 하고 태극이전의 0에까지의 세계를 상술하지 못했으며 또한 理氣에 입각한 우주론을 唱導했을 뿐이다.   그런데 가친의 ”論天堂地獄’장 등을 살펴보면 靈空과 靈界를 설하여 이 세계를 淸界와 濁界, 곧 천당과 지옥으로 분설하여 만물의 구성원을 色素라 하고, 그 색소를 합성시켜주는 것이 氣요, 기의 주인공이 靈이라 하였으며, 또한 心은 七神之靈이라 하여 性 靈 精 氣 神 魂 魄의 그림자라 하고 그 七神의 주인이며 核이 靈이라 하셨다.   이상 가친의 우주론을 약간 살펴보았는데 이는 동양철학상에 있어서도 매우 독특한 지위를 점하는 학설이라 하겠다. 4. 본서에서 또 醫藥篇을 살펴볼 때 현대세계에서 불치의 병으로 알려진 각종 癌病治療의 神藥과 천부의 병으로 알려진 癩病治療의 神祕方 및 眼盲者開眼法, 胎中化男· 化女法 등과 50여년 연구의 所産인 五核丹· 竹鹽 등을 이용한 각종 난치병의 독특한 처방은 고금의 어느 의서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祕方들이라 하겠다.   근래에 와서는 서양에서도 동양철학을 깊이 연구하고 있고 또한 한방의학에 대해서도 크게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는 것이 전 세계적인 추세임을 볼 때 우리도 이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있어야 하리라 생각한다. 원래 나의 염원은 이 책을 모두 한글로 논술하여 많은 독자들에게 읽히도록 하고 싶었다.   이를 가친께도 건의해 보았으나 심오한 우주론을 한글로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점이 많다고 하시어 한문체를 그대로 둔 채 되도록 내 나름대로 현대적인 토를 달아 쉽게 읽히기에 노력하였고, 단지 의약편 만은 가친께 상의를 드려 國 漢文 混用體로하여 독자들이 읽기 쉽게 노력하였다.   그러나 나 자신의 학문의 부족함으로 인하여 원고 정리상에 있어서 많은 오류가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江湖諸賢의 叱正과 海諒이 있기를 앙망할 뿐이다.  끝으로 가친께서는 宇宙와 人體와 藥理의 연관성에 대해서 좀더 깊고 자세한 설명을 가하고 또한 잊었던 기억을 되살려 이 책의 未備點을 보충, 보다 더 完壁에 가까운 醫書로 再著述해 보시겠다고 하니 그때 더 좋은 책으로 만들어 볼 것을 독자제현에 약속한다.                                                                                                                                         1980년  6월초에                                                                                                                                          不肖子 侖禹 謹識 * 위의 발문은 본인이 약 30년전 20대 후반에 인산 선생의 최초의 저서인 《宇宙와 神藥》에 대한 후기로 쓴 발문이다.   당시 선친의 한의학 사상과 의약론을 의철학적 관점에서 내 나름대로 객관적으로 써본 것인데, 당시에는 ‘不肖子’라고만 쓰고 내 이름을 밝히지 않았었다.   가친의 저술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감히 자식의 이름을 밝힌다는 것이 쑥스럽기도 하고 독자의 관점에서 자칫 객관성이 없다고 하지 않을까 염려되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나름대로 객관성을 갖고 쓸려고 노력하였고, 많은 세월이 흐른 후에 다시 읽어보는 발문이나  이때 조금 논급한 선친의 의철학사상에 관한 내용에 있어서는 지금도 생각이 크게 변한 바 없다.   이에 이 글을 접해보지 못한 회원님들의 일독을 위해 약간의 한글화 작업과 교정을 보아 그대로 올려놓는다! 후일 생각해보니 비록 선친에 관한 글이라도 작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으면 작자에 있어서 다른 이의 글로 오해받거나 도용되어 역사왜곡이 될 수도 있기에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이라도 이 점 명확히 하기 위해 본인의 이름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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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산탄신 100주년 기념식
    인산탄신 100주년 기 념 식 제작 : APC뉴스함양지사,상림사진예술회 http://cafe.daum.net/gkdirnr http://www.apcinews.nayana.kr/zbxe/ 일 시 : 2009년 4월 18일 11:00 장 소 : 인산연수원 강당 주 최 : 인 산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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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미지 핵약(核藥)오핵단 먹이=인산=작업
    오핵단 먹이=인산=작업       오핵단 너무 힘든 작업 ^^"  
    신약의세계오핵단
  • 제17회 인산學 체험 2009년.봄 영구법 모임.  
    증득의장영구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