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이유(已酉) 탄생 - 조선 순종 3년

음력 3월(기사(己巳)) 25일(갑술(甲戌)) 하오 10시쯤(을해(乙亥)) 합경남도 흥원군 용운면 연흥리에서 아버지 김경참(金慶參)과 어머니 강릉(江陵) 류씨(劉氏) 사이의 7남 2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꿈에 구름 속에서 신룡(神龍)이 품 안으로 날아 내려오는 것을 보고 잉태하였다 하며 같은 날 밤 할아버지 김면섭(金冕燮)은 꿈에 구름 속에서 봉황(鳳凰)이 날아 내려오는 모습을 보았다하여 처음에는 이름을 운봉(雲鳳)이라 불렀으나 얼마 뒤 운룡(雲龍)으로 고쳤다.

1912~1913 4~5세

한글 자득(自得). 네 살 위의 누나가 당시 유학자(儒學者)이자, 명의(名醫)로 이름 높던 할아버지 김면섭(金冕燮)으로부터 '가갸거겨...'를 외우며 한글 배우는 것을 결에서 지켜보다가 한글이 음양오행(陰陽五行)의 원리에 따라 제정된 것임을 간파하였다.

한글의 구성 원리를 자득(自得)한 뒤 옥편(玉篇)을 뒤적이며 한글본 (춘향전)을 읽고 이어 한문본(漢文本)(춘향전(春香傳))을 읽은 뒤 계속해서 한문본(명사십리(明沙十里)) (능라도) (조운전(趙雲傳)) (충렬전(忠烈傳)) (삼국지(三國志)) (계명편(啓明篇)) (당시(唐詩)) (두시(杜詩)) (강희자전(康熙字典)) 등을 차례로 독파하였다. 말과 글에 눈뜨면서부터 인간과 우주(宇宙)의 제현상(諸現象)을 비롯 인신(人身)의 조직체계와 질병의 유무(有無), 화복수요 (禍福壽夭) 등에 대한 예지(豫知)능력으로 주위를 놀라게 하였으나 가족들은 동네 사랑들로부터 '귀신붙은 아이'로 소문이 날까봐 크게 걱정하였다.

특히 조부 김면섭은 손자가 '신동(神童)'으로 소문나기 시작하자 일제(日帝)치하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못할까 저어하여 재주가 드러나는 것을 엄중 단속하였다. 아버지 김경삼의 학행(學行)이 널리 알려져 여러 곳에서 글방 선생으로 초빙된 까닭에 자주 이사를 다녔는데 이 무렵에는 평안북도 의주군 고령삭면 천마리(天摩里)에서 주로 살았다. 김경삼은 시(詩)와 거문고에 능한 유학자로서 조선 고종 9년(임신(壬申) · 1872)에 태어나 1952년(임진(壬辰))에 81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이 무렵 동네 할아버지들의 서양 천문학예찬에 대한 비판론을 제기, 물의를 빚었다. '서양의 천문학은 망원경 등 관측기기의 발달에 비례하는 극히 편협된 것' 이라고 지적하고 '전우주(全宇宙)를 빠짐없이 관(觀)하고 그것을 토대로 쓰여진 글이 아니므로 일고의가치도 없는 천박한 내용일 것' 이라고 말했다가 호되게 꾸지람을 들었다.

이때 처음으로, 자신의 뇌리에 비치는 우주의 온갖 현상과 시공(時空)을 초월하여 보이는 과거사 미래사의 비밀에 대하여 '아는 것'을 이야기해도 그것을 이해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제대로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1915년 을묘(乙卯) 7세

비 개인 하늘의 5색(色) 무지개를 보고 우주의비밀과 약리(藥理)를 활연대오(豁然大悟)하여 공간 색소중(色素中)의 약분자(藥分子) 합성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부터 병명(病名)조차 모르고 죽어가는 이웃의 불치 · 난치병 환자들을 구료(救療)하기 시작하였다.

1916년 병진(丙辰) 8세

독사에 물려 죽어가는 사람에게 마른 명태(속초 황태(黃太)) 다섯 마리를 달여 먹이도록 했는데 할아버지(당시 이름난 유의(儒醫))에게 건의하여 그대로 한 결과 후유증 없이 치료되었다.

동네 아이 중 같은 또래의 어느 아이가 부족증(不足症)(폐암의 일종)으로 죽음의 위기에 처해있을 때 그 아이를 유인하여 땅벌 둥지근처로 데리고 가서 벌집을 부셔서 수백 마리의 벌에게 쏘이게 하는 방법을 이용, 아이의 생명을 구하였다. 또 다른 부족증 환자에게 까치독사 한 마리를 잡아다가 엄지손가락을 물게 하는 방법을 써서 다른 부작용 내지 후유증 없이 완치시켰다.

(※ 요즘은 인체내에 화공약독축적이 심하여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면 도리어 위험하다.) 이후 할아버지의 처방이라고 하며 자신의 처방을 제시, 병고(病苦)로 신음하는 많은 사람들을 죽음의 위기에서 구제하였다.

1917년 정사(丁巳) 9세

할아버지가 대나무통 속에 천일염을 넣고, 구워서 그것을 이용해 양치질도 하고 눈도 씻고 약이 된다며 그대로 삼키기도 하는 것을 보고 아홉 번 반복해서 구워야 하고 또 아흡 번째 구울 때는 송진 관솔 등으로 목력(火力)을 돋구어 소금을 용해시켜야만 제대로 효과가 날 수 있다는 사실과 원리를 할아버지께 설명하였다.

이로써 조상 대대로 이어져오던 약소금의 제조방법은 일대 전환점을 맞게 된다. 당시까지 전해지던 약소금 제조방법은 장작불에 한두 번 구워서 사용하거나 겻불에 구워 썼는데 그렇게 하여 쓸 경우 고치기 어려운 병에 대한 약리적 효능을 기대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역한 냄새도 나므로 우주의 원리에 따른 지혜로운 제조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이 방법으로 하면 소금 속 독극물의 완벽한 제거와 천상(天上) 태백성(太白星)의 신철분(辛鐵粉), 대나무, 소나무, 황토 중의 묘약(妙藥)합성이 가능하다는 논리다.

1924년 갑자(甲子) 16세 - 대한민국 임시정부 6년

이해 가을, 의주에서 친구들 네 명과 힘을 합해서 당시 한국인 아이들을 괴롭히고 횡포를 일삼던 같은 또래의 일본인 아이 열댓 명을 때려눕힌 뒤 곧바로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가서 광복운동에 투신하였다.

모화산 부대(대장 변창호) 대원으로 몇 번의 전투에 참가했다가 일본 경찰에 쫓겨 소련, 백두산, 묘향산 등지로 도피 하였다. 주로 공사판과 금점판, 산판 등을 돌아다니며 막노동으로 연명하였고 때로는 산속에서 약초를 채취하여 그것을 100리 거리의 장터에 나가 팔아서 양식을 마련하기도하였다. 가는 곳마다 독특한 인술(仁術)로써 병고(病苦)로 신음하는 환자들을 구제하였다.

1926년 병인(丙寅) 18세

평안북도 영변군 북신현면 묘향산 기슭에서 대나무에 소금을 다져 넣고 굽는 것을 아흡번 만복하여 '죽람(竹濫)'을 완성시켰다. 11월 25일 할아버지 김면섭(金冕燮)옹이 향년 75세로 별세하였다. 철종 3년(임자(壬子), 1852)에 태어나 향교의 전교(典校)를 역임하였고 유학자(儒學者)이자 명의(名醫)로 이름이 높았던 인물이다.

1927년정묘(丁卯) 19세

평안북도 영변 장터에서 두 번째로 죽염(竹鹽)을 제조하였다. 손수 풀무를 만들고 드럼통을 구하여 소각로를 제조한 뒤 전남 담양에서 대나무를 구하여 천일염 50kg들이 50포대를 구워내 경비를 댄 친구들과 나누어 썼다.

이때 죽염을 이용, 만성위장병 환자들을 치료해주었고 쑥뜸요법과 병용하여 통장진 수력전기 6호 갱에서 일하는 노무자의 련폐증(練肺症)을 고쳐주었다. 이 무렵 황해도 봉산군의 석탄광산인 사리원 탄광에서 함께 일하던 광부가 진폐증으로 죽게 되자 죽염과 한약, 쑥뜸요법을 병용하여 건강을 되찾아 주었다. 백개자(白芥子)(묘말(妙末)), 행인(杏仁) (묘말(妙末)), 대추, 생강, 원감초를 각각 1근 반씩 한데 두고 달여서 그 탕액을 죽염과 함께 하루 10여 차래씩 복용하여 10일 이 경과하니 호흡이 편해지는 등 효과가 나기 시작하였으며 쑥뜸요법을 병용하여 6개월 만에 죽음의 병 진폐증을 완치시켰다.

1934년 갑술(甲戌) 26세

봄철의 어느 날, 금강산에 숨어 있던 철원경찰서 습격사건의 주동자 변창호의 부탁에 따라 철원으로 가던 도중 김화군(金化郡) 김성면(金城面)에서 서로 얼굴을 아는 조선인 일본형사 리희룡(李熙龍)에 의해 붙잡혀 법원으로부터 징역 3년형을 선고 받고 춘천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년 6개월 되던 어느 날 작업 도중에 탈출하여 묘향산으로 들어갔다. 이 무렵 오대산의 방한암(方漢岩), 예산 덕숭산의 송만공(宋滿空), 김수월(金水月), 백벽산의 강(姜)보살(이름 미상(未詳)) 등 선지식(善知識)들과 도요(道要)를 문답하기도 하였다.

1942년 임오(壬午) 34세

충재(充齋) 김두운(金斗運), 강재(康齋) 문창수(文昌洙) 등의 주도하에 추진되던 총독부 습격사건 계획에 참여, 활동하다가 이듬해 일본경찰의 예비검속에 의해 주동 인물이 모두 체포됨에 따라 또다시 묘향산으로 들어가 설령암, 강선암에 은거하였다. 이때 김두운 문창수 김형로 최니학(최용컨의 부(父))이 주동인물로 검거되어 사형이 확정돼 문창수 형제와 최니학은 사형이 집행되고 김두운과 김형로는 1945년 8월17일에 사형을 집행할 예정이었으나 8월15일 조국광복을 맞아 석방되었다.

1943년 계미(癸未) 35세

평안북도 구성군 천마면의 인동 장(張)씨 집안과 인연이 닿아 1942년부터 왕래가 있던 중 이해 여름 그 집 규수(소녀) 장영옥(張永玉)과 약혼을 하였다. 장영옥은 1930년(경오(庚午))생으로 이때 열네 살이었다. 충재 김두운 선생도 이때 녀식(女息)과의 정혼(定婚)을 제의하였으나 장씨 집안과의 선약(先約)으로 인해 이뤄지지 못하였다.

1945년 을유(乙酉) 37세

8월 15일 조국 광복을 맞아 은신해 있던 의주 천마산 령덕사(靈德寺)에서 하산(下山)하여 충재 김두운 선생 댁을 예방한 뒤 16일 밤 기차를 이용, 이튿날 오전 서울에 도착하였다. 여운형 선생 댁에서 하루 묵고 이튿날 송운(松雲) 방주혁 선생 댁으로 초청되어 주로 그곳에서 머물면서 김규식 백성욱 이명룡 최영호 백운계 송진우 김성수 김범부 정인보 장덕수 김준연 조병옥 김병로 등 애국지사들과 종유(從遊)하며 국사(國事)를 의론하였다.

1948년 무자(戊子) 40세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직후 최영호, 이명룡 선생의 인도로 경무대에 있던 이승만 대통령을 방문, 한방의학과 서양의학의 장점을 상호 수용하여 국민보건향상에 이바지 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한·양방 종합병원의 설립과 한의과대학설립, 방릉(防凌)의 한방이용 등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당시 보건행정의 실권을 갖고 있던 미국인 보건담당 고문의 반대와 한방의학을 무시하는 양의계 보건행정당국 관리들의 비협조로 '한국 의학 발전을 위한 백년대계(百年大計)'는 실현을 보지 못하였다.

이후 계룡산으로 락향(落鄕)하여 불암리 우적동(골) 삼신당, 불암리 1구 불암사, 불암리3구 백암동 서문달 등지에 머물면서 오핵단(五核丹), 죽염(竹鹽) 등 암약 실험과 글방 훈장(訓長), 산판목물(木物) 등으로 생계(生計)를 이어갔다. 계룡산 삼신당에 살 때는 독립지사 정원경의 큰 아들 정운복(鄭運福)의 재정지원을 받으며 한해 여름을 그곳에서 숙식(宿食)하였다.

이때 만주에서 독립 운동하던 독립지사 이현익도 그곳에서 함께 기거하였다. 정운복은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순국(殉國)한아버지 정원경을 생각하여 논밭을 팔아서 독립지사 생활비를 지원하였다.

당시 정운복의 가족은 경찰관으로 일하는 세복(世福)과 광복(6.25때 사망)이 있었다. 백암동 서문달에서는 나무를 해다가 엿달이는 집에 공급하는 것으로 생계를 꾸렸다. 김 옹은 이에 앞서 고향에 있던 아버지 경삼 옹, 구성군 천마면에 있던 아내 장영옥(張永玉)과 함께 월남(越南)하였다. 이해에 첫 아이로 딸 부남을 얻는다.

1947년 계룡산 백암동에 살 때 어디서 나타났는지 어른 뼘으로 한 뼘이 넘는 커다란 두꺼비 한 마리가 찾아와 부엌에서 살았다. 아내 뒤를 따라다니며 밭을 갈 때 나오는 지렁이 등을 주워 먹기도 하고 다른 음식 찌꺼기도 얻어먹고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밭에서 일을 하다가 잠시 두꺼비가 보이지 않기에 주위를 둘러보다가 커다란 능구렁이와 두꺼비가 서로 노려보다가 능구렁이가 두꺼비를 덥썩 무는 것을 목격하였다.

김 옹은 그때 아직 소생(所生)도 없고 해서 아내와 함께 두꺼비를 애지중지하던 터 였으므로 홧김에 커다란 돌을 들어 능구렁이를 내리쳐 죽여 버렸다. 그날 밤 꿈에 그 능구렁이가 나타나 왼손엄지손가락을 무는 것이었다.

이튿날 묘하게도 아내가 아이를 잉태하였으므로 부길(不吉)한 예감이 들었다. 마침내 아이를 출산하니 바로 부남이었다. 자랄수록 보통 예쁘고 귀여운 것이 아니었으나 능구렁이 후신(後身)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김 웅은 늘 아이를 외면하였다. 그러나 아버지 경삼 옹과 아내는 아이를 매우 귀여워하였다.

1950년 경인(庚寅) 42세

내무부장관 백성욱 박사와 앞으로 일어날 전쟁에 대한 대비책을 논의하였으나 백박사의 진언(進言)이 묵살됨에 따라 실현이 불가능하게 되자 이해 3월에 부산으로 가서 세춘(世春)한의원을 개설, 운영하였다. 여름에 마곡사 부근에서 아버지를 모시고 살고 있던 아내로부터 딸 부남이 위급하니 곧 와달라는 이야기를 들었으나 가지 않았다.

아이는 먹는 것마다 다 설사를 하다가죽었다. 아이는 드물게도 뱀 창자 형태의 곧은 창자였다. 아버지와 아내는 딸 부남의 죽음으로 인해 적지 않은 심적(心的) 상처를 받았다.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였다.

1951년 신묘(辛卯) 43세

충남 공주군 사곡면 운암리 태화산 마곡사 냇물 건너편 참나무쟁이 지와막 김효생씨(기와공장 기술자) 곁방서 살았다. 지와막에서는 주로 산판에서 목물(木物)일로 생계를 삼았다.

1952년 임진(壬辰) 44세

윤 5월에 아버지 경삼옹이 81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조선 고종 9년(임신(壬申) , 1872)에 태어나 1910년 순종으로부터 통천군수(通川郡守)로 발령받았으나 한일합병으로 인해 부임하지 못했다. 마곡사서 북쪽으로 약 2km 거리의 동해리 태화산 기슭에 묘소가 있다. 음력7월에 장남 윤우 얻음.

1953년 계사(癸巳) 45세

겨울에 논산군 삼월면 상도리 도화동(桃花洞) 박살미 계룡산 감나무골 정두채 씨(농부) 사랑방으로 이사하였다. 상도리는 본디 노성군 상도면이었는데 일본 통치이후 논산군 상월면 상도리로 개편되었다. 박살미는 그곳에박(朴)씨들이 주로 많았으므로 박산(朴山)메라 부르다가 변화된 것으로 보인다. 주민들은 대개농사를 지어 살았다. 삼도리 상월 국민학교까지는 20여리나 되는데 아이들은 걸어서 학교에 다녔다.

1955년 을미(乙未) 47세

여름 6월에 계룡산 서편 상도리(上道里) 룡화사(龍華寺) 골짜기 정두채씨 사랑방서 차남(次男) 윤세 얻음.

1955~56년 47~48세

서울 종로1가 평택여관(화신여관)에 묵으면서 이기붕 방조기관성격이 짙은 삼일정신선양회 조직에 참여 활동. 동회(同會)의 총재는 당시부통령 함태영 선생이고, 부총재는 김병로 선생이었다. 이 회는 처음에 이승만 대통령의 제안으로 함태영 부통령에 의해 추진되었다.

은진의 최영호 선생이 김일훈 옹을 찾아와 대통령이 만나고 싶어 한다고 하여 상경(上京), 경무대 서장 김장흥(金長興)의 안내로 들어가니 이 대통령은 '함 부통령에게 부탁해 놓은 일이 있으니 꼭 힘써 추진해 달라'고 당부하였다. 서소문 함 부통령 댁으로 찾아가니 함 부통령은 삼일청신선양회 전국포직책임을 맡아달라고 하여 이를 거절하였으나 함 부통령과 김병로 선생의 강권(强勸)으로 조직 작업에 착수하였다.

먼저 구한말 남판서의 아들로서 독립 운동가이며 함 부통령과도 친한 사이인 낭상철 선생을 찾아가 중앙회회장직을 맡아줄 것을 요청, 승낙을 받았다. 이에 서울의 조직과 기타 작업은 남 회장이 맡고 김 옹은 지방조직을 맡기로 약정하고 이후 조직 업무를 마친 뒤 곧바로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삼일정신선양회의 설립 취지는 좋았지만 실제로는 선거운동에 이용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로 인해 재앙을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956년 병신(丙申) 48세

충남 대전시에서 차녀 윤정 얻음

1957년 정유(丁酉) 49세

여름에 계룡산 도화동을 떠나 전북 남편과 운봉에서 한 달 가량 살다가 경남 함양(咸陽)으로갔다. 함양에서는 명의(名醫)로 이름난 우태진(郵泰振)의정약국 사랑채에서 두어 달 지내고 하한조의 백연리 산정(山亭)에서 또 두어 달 지냈다.

이때 함양읍에서 가깝게 지낸 인물들로는 정약국, 정태진, 함양 양조장 대표 노영인, 유림면장 허사원, 함양군 교육감 정연섭, 정연창, 휴천양조장 대표 정낙현, 하한조, 윤일병, 민영조(상월면 사람) 등이었다.

겨울에 함양읍을 떠나 휴천면 행정리(살구쟁이) 삼봉산 골짜기 마을로 들어가 이계춘, 최동기, 림상윤(林尙允) 씨 등의 소유 빈집 또는 곁방서 살면서 함지박을 깎아 팔아다가 생계(生計)를 이어갔다. 함지박을 잘 파서 함지박 하나의 값으로 쌀 서 말 값을 받았다.

이때 함지박을 팔기 위해 지게에 지거나 머리에 이고 오도재를 넘어 마천 장터까지 70~80리 산길을 오가기도 하였고 뒤에는 주로 30거리의 함양 장에 내다 팔았다. 이 무협 한 친구의 부인이 위(胃)와 담(膽)의 오랜 고질로 고생하기에 중완에 침을 깊숙이 놓았다가 갑자기 뽑으니 피 고름이 분수처럼 솟구쳐 한동안 방안을 적시었다. 부인은'10년 묵은 체증이 확 뚫리는 듯하다'고 시원함을 토로하였다. 침을 맞고 난 이후 그 부인의 오랜 고질병은 완전히 해결되었다.

1959년 이해(已亥) 51세

여름에 삼남(三男) 윤수 얻음

1960년 경자(庚子) 52세

4월19일, 학생들의 의거(義擧)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었다. 여름에 아내 장영옥이 세상을 떠났다. 장영옥은 과거 계룡산에 살 때 그네뛰기에 능숙하여 자주 그네를 탔다.

한 번은 누가 그내의 상단 부분을 통으로 거의 잘라놓은 것을 모르고 그네를 타다가 마침 그네가 하늘 높이 솟구쳤을 때 그네 줄이 끊어져 떨어지는 바람에 중상(重傷)을 입은 적이 있었다. 이때 김옹이 약첩을 지어 복용케 하여 목숨은 구하였으나 후유증이 있을 것을 염려, '쑥뜸'을 뜨자고 권하였다. 그러나 장영옥은 '이런 세상에 무에 그리 애착을 갖고 살고 싶은 마음이 있겠느냐'며 사양해왔는데 이때 아이를 낳고 나서 장(腸) 파열로 고생하다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삼남 윤수는 한동네 임상윤의 딸 순덕(당시 열서너 살) 등이 업어 키웠는데 우는 아이를 달래기 위해 오징어 마른명태를 자주 먹였으므로 횟배를 심하게 앓아 죽게 되었다.

김 옹은 이 무렵 서울로 갔다가 한동안 머물다 오곤 하였는데 언젠가 살구쟁이에 돌아와 보니 아이가 횟배로 죽게 되었으므로 급히 죽염을 제조하여 '활명수(活命水)'에 타서 먹여 치유시켰다. 겨울이 시작되자 아이들을 데리고 삼봉산을 떠나 주거지를 서울로 옮겼다.

중구민 현동에 있던 제자 이영복의 집에서 한동안 머물다가 고향 사람 김의환(金義煥)의 요청으로 중구 주교통에 있는 그의 집으로 옮겼다. 김의환은 평북 의주군 피현면 사람으로서 김 옹과 나이가 같았으며 주교동에서 사탕집을 하였으므로 '사탕집 영감'으로 불리웠다.

1961년 신축(辛丑) 53세

주교동 김의환 씨 댁과 종로 5가 시중(施衆)한의원(피현 출신 박 장로와 공동 경영)에서 수많은 난치, 블치병 환자를 고쳐주었다. 이 무렵 서울 장안에서는 '묘향산(妙香山) 활불(活佛)이나타나 죽어가는 사람들을 구제해주고 었다'는 소문이 한동안 사랑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이매 쑥뜸으로 광나무 모사(某寺)의 소경 어대사(魚大師)의 눈을 뜨게 하는 치료에 성공한다. 당시48세의 어 대사는 17세 때 열병을 않다가 시신경(視神經)이 끊어져 소경이 된 이래 30여년동안 절에서 부처님께 다시 눈을 볼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를 했으나 영험이 없자 좌절해 있던 참이었다.

절에 온 기도객으로부터 묘향산의 활불(活佛)이서울에 나타났다는 소문을 듣고 물어물어 찾아와 '령구법(靈灸法)'에 대한 가르침을 들은 뒤40일 동안 극심한 고통을 감내하며 뜸을 뜬 끝에 시력(視力)을 회복, 잃었던 광명(光明)을 되찾은 것이다. 어 대사는 그 뒤 10여 년 동안 7명의 소경을 손수 뜸으로 고쳐주고는 58세 되던 해 생(生)을 마쳤다.

이 무렵 소문을 듣고 아들과 며느리를 보내온 마포의 어느 할머니는 나면서부터 소경이었는데 자신의 눈도 보게 해달라고 간곡하게 청하여 이에 뜸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 할머니는 단 하루만 살아도 좋으니 꼭 눈을 보게 해달라고 졸라대어 부득이 또 '령구법(靈灸法)'을 일러준 것이다.

그 할머니는 단 한 번만이라도 밝은 세상을 보고 싶은 일념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뜨더니 마침내 40일 만에 기적 척으로 광명을 되찾았다. 30대의 어느 여인은 결혼하기 전에 척수염을 않은 적이 있었는데 결혼하여 아이를 출산한 뒤 급작스레 악화되어 허리가 굽어지고 다리를 못 쓰게 되었다.

'앉은뱅이'가된 것이었다. 김옹의 지시에 따라 단전과 양쪽 족삼리(足三里)혈에 쑥뜸을 뜬지 60여 일 만에 허리가 펴지고 다리에 힘이 붙기 시작해1백 여 일 만에 가까스로 제 힘으로 일어날 수 있었다. 3년간을 계속 뜨더니 몰라볼 정도로 치유되었다. 이때 간질환자, 곱사, 뇌염, 폐암, 폐결핵등 고치기 어려운 병으로 고생하던 사람들을 구료(救療)하였다.

1962년 임인(壬寅) 54세

삼양동 북한산 기슭에서 산을 파내고 지붕을 얹어 토굴을 만들어 살다가 셋방을 얻어 전전하였다. 이때 1년 평균 4~5차례씩 이사를 다녔다. 재취 양씨를 맞아 사남(四男) 윤국을 얻음.

1964년 갑진(甲辰) 56세

삼양동 북한산 기슭 임야에 15평 규모의 기와집을 손수 건립하여 입주함으로써 최초의 살림집 장만. 이해 8월 20일 취적신고하고 12월 30일 아이들의 출생신고로 이곳이 본적이 되었음. 당시 주소 성북구 미아동산111번지, 원적은 평안북도 의주군 고령삭면 친마리 153번지.

1965년 을사(乙巳) 57세

재취 양씨와 이혼하고 충남 대전시 신흥동으로 주거지를 옮겨 과거에 잠시 동거하다별거해온 대덕군 탄동의 재취 김씨와 재결합하였음.

1967년 정미(丁未) 59세

서울 중구 충무로 5가로 주거지를 옮겨 성혜(聖惠)한의원 개설. 이 무렵 모(某) 기업 회장 아들이 음독(飮毒)으로 인한 사망 직전에 쑥뜸으로 구하는 등 수많은 환자와 급사자(急死者)들을 구제하였다.

1969년 기유(己酉) 61세

충무로 5가 양모 변호사 소유 2층 집으로 주거지 옮김. 환갑 맞음

1970년 경술(庚戌) 72세

주거지를 종로구 수송동 혈액은행 건물로 옮김. 이때 가재(家財)를 기울여 오핵단, 죽염등 각종 암약을 실험. 이 무렵 (대한화보) 71년 11월 호부터 72년 7월 호까지 8면에 걸처 '신종철학(神宗哲學) 역비전(易秘傳)' 기사 연재. 극심한목상(火傷)으로 죽어가는 사람에게 오이생즙을 먹여 구하는 등 무수히 구제.

1973~74년

수송동에서 종로구 창신동, 중구 장충동등지로 이사 다니다가 7월 14일 경남 함양군 함양읍 상동으로 주거지를 옮김.

1975~78년

함양읍내에서 교산리 봉강, 상동 155-3번지 등으로 주거지를 옮겨 다니다가 78년 11월 서울 도봉구 수유동 397의 1번지로 이사함. 이 기간 중 '의약부국(醫藥富國)의 길'을 제시하는 내용의 대통령께 올리는 건의문(建議文)을 일곱 차례 제출. 서울역 앞 동자동 고려한방병원에서 난치병 담당 고문으로 병자(病者)구제에 힘썼다.

1980년 광신(廣申) 72세

수유동 399의 9번지에 거주하며 (자주(字宙)와신약(神藥)) 저술하여 출간.

1981년 신유(辛酉) 73세

(우주(宇宙)와 신약(神藥))의 한글화를 시도한 (구세신방(救世神方))을 출간. 12월 31일 경남 함양읍 하동586-3번지로 가족을 데리고 낙향.

1983년 계해(癸亥) 75세

주거지를 하등에서 상동(운립리) 154의3 번지로 옮김 (45년 광복 이후 78회째)

1986년 병인(丙寅) 78세

암 난치병과 각종 괴질에 대한 일생의 경험 의방(醫方)을 모아 (신약(神藥)) 출간. 6월 20일한국일보 12층 대강당서 (신약(神藥)) 출간 기념강연회 갖고 '신증(神蒸)의 실상(實相)과 그 활용방법'이라는 연제로 강연하였다.

1987년 정묘(丁卯) 79세

주경섭, 주경화, 전철옹,안현택,이준숭,조백간,남기민 등의 발기로 서울프레스센타 19층에서 2백여 명의 발기인이 동참한 가운데 민속 신약(神藥)연구회가 창립되고 김옹을 종신(終身)회장으로 추대하였다. 이 모임은90년 3월 '건강문제연구시민모임'이라는 이름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1989년 기사(己巳) 81세

김옹의 인술(仁術)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바램에 따라 월간 (민의약(民醫藥)) 89년 7월호로 창간돼 김옹을 회장으로 추대

1990년 경오(庚午) 82세

월간 (민의약(民醫藥))의 제호를 4·5월호부터 (건강저널)로 변경하여 발행. 이 잡지는 김옹의 특이한 의방(醫方)을 연구 실천 보급하는 한편동서(東西) 의학(醫學)의 상호 수용을 통한 발전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4월에 상동(을림리) 154의 3번지 자댁(自宅)을처분하고 함양읍 죽림리(竹林里)(山)194의 3번지에 낡은 집을 허물고 26평 규모로 조립식 판넬 주택을 지어 입주하였다. (79회 ) 그러나 이집이 무허가 주택이라는 이유로 철거됨으로써(자진철거) 다시 죽림리(竹林里) 1048-2 인산죽염제조장 부지내로 옮겨 지은 조립식 주택으로 주거지를 옮겼다. 이로써 김옹은 1945년 광복이후 모두 80회의 이사기록을 갖게 되었다.

1992년 임신(壬申) 84세

84세 때인 1992년 임신년 음력 3월 3일, 가족들을 모이게 한 뒤 '세상에 남기고 가는 말'을 녹음토록 한다. " 인업을 중시함이 부국의 지름길 " 이라는 요지의 이 말씀은 유언이 되었으며, 그 녹음한 전문이 시사춘추 92년 4월호에 수록되었다. 마지막 가는 순간까지 자신을 돌보지 않고 오로지 가난하고 병든 이들에 대한 사랑과 나라에 대한 충정, 세상 사람들에 대한 효의 가르침에 관심을 가질 뿐이었다.

선생은, 1989년부터 1992년초까지 삼남댁인 신약당에서 거처하시다가 1992년 5월 19일(음력 4월 17일) 오후 11시 25분 경남 함양군 함양읍 교산리 함양아파트 차남 윤세 씨 집에서 파란만장했던 생애를 마감하고 선계로 떠났다. 선생이 가신 뒤 생전에 환자들을 맞아주던 이곳 삼봉산 인산농장 산등성이에 법구를 안장하였으며, 7월 6일 지리산 실상사에서 봉행된 사십구제때는 평소 자신의 사후에 나오리라고 예언하였던 '신약본초(神藥本草)'를 영전에 바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