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인구세의 80년! 병들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한, 활인구세의 80년!
인산 김일훈 선생은 1909년 기유년 조선 순종 3년 음력 3월 25일 밤 10시쯤 부친 언양김씨 김경삼과 모친 강릉 유씨 사이의 7남 2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난 곳은 함경남도 홍원군 용운면 연홍리, 구름속에서 용이 품안으로 날아드는 태몽이 있어 구름 운(雲)자, 용 용(龍)자 '운룡'이라 이름 지었으며, 그 이름을 해방 직후까지 쓰게 된다. 본명은 김철진(金哲鎭), 맏형은 두꺼비집을 발명한 김봉진(金鳳鎭)이다.
김일훈 옹은 관향이 언양(彦陽)이다. 신라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의 28세손이 신라 56대 임금 경순왕(敬順王)이고 경순왕의 일곱째 아들로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외손인 언양군(彦陽君) 김선(金繕)이 언양 김(金)씨의 제1세조(祖)가 된다.
언양 김씨는 신라시대에 왕으로 38대이며, 고려 조선시대에는 도학(道學), 충효(忠孝), 절의(節義), 장상(將相), 석학(碩學)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배출되었다. 이들은 한결같이 영달을 탐하지 않고 고고히 살다가국가가 외침을 당할 때면 분연히 일어나 선봉에 서서 싸웠던 애국충신이요, 열사들이었다.
언양군 8세손 위렬공(威烈公) 김취려(金就礪) 장군은 고려 고종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북방 거란병들의 여러 차례에 걸친 변경 침입을 격퇴한 명장일 뿐 아니라 이름 난 재상이기도하였다.
언양 김씨 가문에서는 이렇듯 출장입상(出將入相)하였던 인물이 적지 않게 배출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조선조 임진왜란 때 활약한 김천종(金千鐘) 장군은 특히 유명하다. 김천일 장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대장이 되어 도처에서 왜군을 크게 무찌르고 진주성 싸움에서 압도적인 수적 열세를 무릅쓰고 끝까지 싸우다가 아들 김상건(金象乾)과 함께 장렬히 전사하였다.
언양군의 17세손 직장공(直長公) 김속(金涑)은 직장공파 계파의 시원(始源)이 되는 인물이다. 직장공 김속의 아들 김사지(金四知)는 조선조 성종 23년 별시(別試) 병과(丙科)에 급제한 뒤 성균관 전적(典籍), 사량원(司諒院) 정언(正言), 육조의 좌랑 (佐郎) 등을 역임하였으며 김사지의 다섯째 아들 김한공(金漢功)은 빈 좌수(座首)를 지낸 바 있다.
김일훈 옹은 언양군의 19세손인 김한공의 직계 후손이다.
좀더 알기 쉽도록 직장공부터 세계(世系)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언양군 (彦陽君) 17세손(世孫) 직장공(直長公) 김속(金速)-18세 사지(四知)-19세 한공 (漢功)-20세 응호(應虎)-21세 경복(景福) -22세 구(球)-23세 태형(兌亨)-24세 용추(用秋) -25세 익순(益純)-26세 상조(尙兆)-27세 광려(光麗)(진토(進土))- 28세 정은(楨殷)(생원(生員))-29세 면변(冕變)(전교(典校))-30세 경참(慶參) (통천군수(通川郡守))-31세 일훈(一勳). 김 옹의 증조부 정은은 조선 순조 32년(年)(Q진(辰), 1832) 12월에 태어나 고종 건양원년(建陽元年)(병신(丙申), 1896) 3월 22일에 별세하였으며 조부 면섭은 조선 철종 3년(임자(壬子),1852) 5월 8일에 태어나 일정(日政)시대인 대한민국 임시정부 8년(병인(丙寅), 1926) 11월25일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 경삼은 고종 9년(임신(壬申) 1872) 3월23일에 태어나 순종 4년 (경무(庚戊), 1910)에 통천(通川) 군수(郡守)로 발령받았으나 그해 한일(韓日)합방으로 인해 부임하지 못하고 학문에 힘쓰다가 1952년 윤(閏)5월 23일 81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김경삼의 슬하에는 봉진(鳳鎭) 철진(哲鎭) 익감(益鑑) 영진(永鎭) 순진(順鎭) 무진(茂鎭) 등 7남 2녀가 있다.
김옹은 어린시절부터 홍원의 형제들과 헤어져 아버지(김경삼)를 따라 의주에 가서주로 살다가 16세 때 광복운동을 위해 집을 떠나 가족들과 헤어져 왕래를 끊고살았기 때문에 족보에서 이름이 누락되었다.
인산(仁山)이라는 호는 독립운동시 묘향산 등 명산(名山)에 은거하면서 인술(仁術)을 이용한 활인구세(活人救世)의 행적이 있다고 하여 독립지사 석계(石溪) 문빈(文彬)선생과 임시정부 독립신문 사장희산(希山) 김승학(金承學), 평북의 거유(巨儒) 계운산인(桂雲山人) 김두운(金斗運) 등이 붙여주었다.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던 일제 때 만주,연해주,백두산,묘향산 등지에서 쓰던 이름은 지을룡(池乙龍)이고 일훈(一勳)이라는 이름은 광복 이후 스스로 개명(改名)한 것이며 개명할 때까지 주로 사용되었던 이름은 운룡(雲龍)이었다.
구한말(舊韓末) 의병(義兵)대장 류린석(柳麟錫) 선생의 제자인 김두운 선생의 문인(門人)으로서, 해방 직후 화서(華西) 리항로(李恒老)의 손자인 리광암(李廣庵) 선생(先生)에게 역비전(易秘傳)과 중용도간(中庸圖看) 등을 전수받은 바있다. 슬하에 4남 2녀를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