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마을 현장을 가다 3]스페인 몬드라곤 그룹
《스페인 북부 피레네산맥 끝자락에 자리잡은 산악도시 몬드라곤. 몬드라곤은 스페인 공업도시 빌바오에서 50㎞, 지명을 딴 영화제로 널리 알려진 산세바스티안에서 100㎞나 떨어진 외진 산골이다. 이 산골에서 ‘이기적인 자본주의와 비인간적인 사회주의’를 넘어서는 제3의 길이 탄생했다. 골짜기에 자리잡은 현대적 도시가 상전벽해(桑田碧海)와 같은 변화의 상징이다. 선진국 도시 교외에서나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주택들과 깔끔한 상점들이 곳곳을 수놓고 있다.》
이 소도시를 내려다보는 산중턱에 스페인 내 연간 매출규모 8위, 그리고 일자리 창출규모로는 3위의 대기업 본부가 있다. 몬드라곤그룹(Mondragon Corporation Cooperative·MCC). 40여년 전 퇴락한 광산촌락이던 몬드라곤을 현대적인 전원형 공업도시로 탈바꿈시킨 성장 엔진이 바로 MCC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세계화의 표준’이 돼버린 반면 공동체를 지키려는 대부분의 시도가 소규모 자족집단의 건설에 머무르고 있는 시대에 MCC의 위치는 독보적이다.
MCC는 빠른 속도로 성장하면서도 ‘자율적인 인간들의 연대’라는 틀을 지킬 수 있는, 대안적 세계화의 모델로 평가받고 있다.
MCC는 1인1표주의라는 민주적 방식에 의해 노동자들이 경영에 직접 참여하는 ‘노동자 자주관리기업’이다. MCC의 조합원들은 각 단위 조합에서 임기 4년의 조합장과 경영진을 선출하고 이들이 선출한 조합대표들은 다시 그룹의 최고책임자인 회장(President·현재는 후에수스 카타니아)을 비롯한 경영진과 감사 등을 선출한다.
산골마을 중턱에 위차한 MCC 본부 - 사진제공=몬드라곤그룹
유럽의 노동자 자주관리 시도는 대부분 권한이 결국 위로 집중되거나 아래의 눈치만 살피는 비효율적인 조직으로 귀착돼 왔다. 몬드라곤은 교육의 힘을 통해 이 같은 위험을 피해왔다. 교육받은 노동자들이 자주적인 조직에서 주어진 권한과 책임을 충분히 이해하고 창조성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다. MCC는 이 때문에 창립 초기부터 교육을 핵심가치로 두고 매년 수익의 10% 이상을 지역사회의 교육에 투자했다. MCC의 지원으로 설립된 몬드라곤기술대학은 하버드대, MIT대 등과 교류하는 수준 높은 대학으로 성장해 MCC의 핵심인력을 배출하고 있다.
MCC는 시(市)와 직접 관련은 없지만 사실상 몬드라곤 주민들의 삶과 일체화돼 있다. 몬드라곤 인구 2만5000여명 중 노동가능 인구는 1만3000명 정도. 이 중 3분의 2가량인 8300여명이 MCC의 조합원이다.
이들은 몬드라곤그룹 산하의 금융기관인 ‘카하 라보랄(노동인민금고)’에서 대출을 받고 산하 소비협동조합인 ‘에로스키’에서 각종 생활용품을 산다. 또 복지기구인 ‘라군 아로’에서 건강보험과 노후복지 혜택을 받으며 이들 자녀의 상당수는 MCC의 재정적 지원을 받는 몬드라곤기술대학을 졸업한 뒤 MCC에 취직한다.
조합원들에 의해 선출된 조합대표들이 총회에서 표결하는 장면. - 사진제공=몬드라곤그룹
4월29일 몬드라곤 시내 카하 라보랄 한 지점에서 만난 에나르 카노(50·여)는 “MCC가 없는 삶은 몬드라곤에서는 생각하기 힘들다”며 “대부분의 사람이 몬드라곤의 삶에 만족한다”고 말했다. 주민들은 저녁이면 시내 곳곳의 선술집에서 포도주잔을 기울이며 격의 없이 ‘공동의 문제’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인다.
이처럼 풍요롭고 민주적인 공동체는 40여년 전 한 조그만 주물공장에서 시작됐다. 56년 11월 12일 몬드라곤 시내의 한 주물공장. 수십명의 마을주민이 모여 MCC의 모태가 된 ‘울고르(ULGOR)’라는 노동자생산협동조합의 탄생을 자축했다. 울고르는 지역주민들이 모은 1100만페세타(당시 환율로 36만1604달러)를 자본금으로 설립한 MCC의 첫 협동조합이었다.
조합원들의 주인의식을 바탕으로 성장을 거듭한 울고르는 60년대 초반 이미 스페인 내 100대 기업으로 떠올랐다. 이 같은 울고르의 성공을 모델로 아라사테, 코프레시, 에델란 등 다른 생산협동조합이 속속 생겨나 MCC로 묶이기 시작했다. MCC는 80년대 초 스페인 경제가 침체에 빠졌을 때 몇 년간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이후 줄곧 고속성장을 지속했다. 울고르 설립 이후 MCC는 순익 기준으로 연평균 7.5%, 일자리 창출 규모로 연평균 10% 성장했다.
현재 MCC는 해외 23개 공장을 포함해 모두 123개 공장에서 6만여명을 고용하는 굴지의 대기업이다. 산하 조합에서는 자동차부품과 가전 및 전자제품, 가구, 공업용 기계, 의료기기, 버스 등 수백종의 품목을 생산해 일부는 해외에 수출하고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소규모 조합단위에 맞춰 설계된 초기의 운영원리들이 훼손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몬드라곤의 에로스키 매장에서 15년 동안 점원으로 일해온 아마야 오시나가(37·여)는 “갈수록 회사 경영에 참여할 기회가 줄어드는 것 같다”며 “요새는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를 때가 많다”고 말했다.
규모의 경제가 ‘노동자의 소외’를 잉태하고 있는 것일까.
후안 루이스 아레기 MCC 재무담당이사는 “시간이 갈수록 창립 초기의 정신이 퇴색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회사의 각종 제도와 내규에 그 같은 정신이 충분히 구현돼 있어 MCC가 쉽게 변질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신적 지도자 故 호세신부▼
호세 마리아 아리스멘디아리에타 신부(사진). 몬드라곤그룹(MCC)에서는 그를 ‘몬드라곤의 정신적 지주’라고 부른다. MCC의 후안 루이스 아레기 자금담당이사는 “호세 신부라는 탁월한 지도자가 없었더라면 몬드라곤의 오늘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호세 신부는 15년 몬드라곤에서 50㎞정도 떨어진 마르키나에서 자영농장주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41년 첫 신부 부임지로 발령받은 곳이 몬드라곤. 그는 스페인 내전의 상처가 곳곳에 남아 있는 광산도시 몬드라곤을 되살리는 길은 노동과 교육뿐임을 설교했다. 그러나 내성적인 성격인 호세 신부의 지루한 설교를 귀담아 듣는 이는 거의 없었다.
그러자 그는 직접 행동에 나섰다. 어린 시절 왼쪽 눈이 실명돼 운동에 소질이 없는 데도 축구리그를 만들어 청년들을 규합했고 학부모들을 상대로 학교설립운동도 펼쳤다. 처음에는 그를 ‘빨갱이 신부’로 봤던 학부모들도 하나둘씩 그의 주위에 모여들었다.
43년 지역주민들의 후원으로 ‘기술전문학교’를 설립한 그는 직접 학생들에게 철학과 신학, 사회학 등을 폭넓게 가르쳤다. 또 학교 울타리 밖에서도 약 2000여개의 공부모임을 이끌며 청소년 교육에 헌신적으로 매달렸다.
그의 노력으로 교육받은 청년들이 대거 배출됐으나 정작 일자리를 구한 청년은 거의 없었다. 스페인내전으로 몬드라곤의 모든 산업기반이 붕괴됐던 것. 그나마 취직을 하더라도 열악한 근로조건 때문에 ‘노동의 보람’을 느끼는 젊은이는 거의 없었다.
호세 신부는 고민을 거듭한 끝에 제3의 방식으로서의 생산협동조합에 착안했다. 그가 이후 자신들의 제자와 지역주민들의 성금을 모아 설립한 첫 생산조합이 바로 MCC의 모태인 ‘울고’였다. 그는 끊임없는 토론을 통해 세계에 유례없는 노동자 경영기업의 전형을 만들어냈고 76년 숨질 때까지 헌신했다.
몬드라곤 기술대학의 호세 루이스 학장은 “그는 한쪽 눈만으로도 현실과 미래를 훨씬 정확히 짚어내 몬드라곤 주민들을 미래의 영역으로 이끌었던 선지자였다”고 평가했다.
▼헤라스티 국제협력 이사▼
“다 같이 좋거나 다 같이 나쁘거나 둘 중 하나다.”
헤수스 헤라스티 몬드라곤그룹(MCC) 국제협력담당이사(59·사진)는 MCC의 공동운명체적 성격을 이같이 설명했다.
모든 조합원들이 일반기업의 경영자처럼 권한과 책임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헤라스티 이사 자신이 ‘100% 몬드라곤에서 만들어진 사람’이다. 그는 몬드라곤 기술대학을 졸업하고 24세 때인 67년 MCC산하 전자부품 생산조합인 ‘파고르’에 입사한 뒤 35년간 ‘MCC맨’으로 살아왔다. 그는 79년부터 4년 동안 몬드라곤 시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헤라스티 이사는 “직원 스스로 주인의식과 참여의식을 바탕으로 한 경영이 빠르게 기업을 성장시킬 수 있는 미래의 경영형태”라고 말했다. 그는 “MCC의 성공사례를 국제적으로 널리 알리는 일이 중요한 과제”라며 “일본과 중국 콜롬비아 브라질 등 수십여개 국가에서 우리 사례를 배우기 위해 다녀갔다”고 소개했다. 그는 특히 콜롬비아 페레이라 지역에서 신부들의 주도로 MCC 방식의 생산협동조합들이 착실히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교육받은 근로자들이 많은 한국에서도 ‘MCC모델’은 충분히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며 “한국의 젊은이들이 우리 모델을 배우려 한다면 적극적으로 지원할 의사가 있다”고 말했다.
인터뷰가 끝날 때쯤 ‘임금 평등’을 강조하는 내규 때문에 다른 기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박봉인 경영진의 급여수준에 불만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는 “돈이야 먹고 살만큼만 있으면 되는 것 아니냐”고 짧게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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