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인부전※
(非人不傳)
정경부인 심씨의 병세가 현저하게 호전됐다. 표현 그대로 신체의 오른쪽이 돌덩이처럼 반신불수이던 그녀의 몸이 확실히 성한 손처럼 되살아나 딸의 부축을 받으며 아침 저녁 마당으로 걸어내려와 몸종이 대령하는 놋대야에서 스스로 소세를 할 만큼 된 것이다.
이 소문을 들은 마을 사람들의 눈길은 수년 동안 병상에서 기동 못하던 정경부인이 위태로운 걸음으로 마당을 거니는 그 모습 못지않게 말수 적은 모습으로 서 있는 허준이란 젊은 의원을 마치 약사여래불의 재림을 보듯 외경의 눈으로 지켜보며 떠들썩했다.
그 정경부인이 다시 딸의 부축을 물리치고 당신 스스로 옷을 갈아 입고 머리를 빗기 시작한 것은 허준이 성대감집에 온 지 보름이 되던 날이었다.
병세가 호전의 증후에서 완치로 이행한 걸 확인한 그날 이윽고 허준은 병자와 가족들 앞에서 앞으로 병자를 간병할 제 명심할 조목들을 적어 내주고 산청으로 돌아갈 뜻을 비쳤다.
"더 이상 침술을 시행함이 없어도 괜치않겠는가?"
성대감의 말씨는 처음의 냉정한 하대에서 이젠 반공대로 바뀌어 있었다.
"소인의 판단은 그러합니다. 하오나 ..."
"기탄없이 무슨 말이고 다 말해주게. 그대가 하라는 말이면 내 무엇이건 하리."
"그런 뜻이 아니오라 소인의 재주는 다 했사옵고 일차 스승님이 다녀가시어 간심하실 일이 남았다 여기옵니다. 다른 걱정은 끝났다고 여기옵니다."
"정말 고마우이."
성대감이 지극한 신뢰를 담아 그 허준을 바라보았고 곁에 있던 정경부인이 허준의 한 손을 두 손으로 잡으며 눈물을 글썽였다.
"스승이 그 누구든 다른 사람 다 필요없으니 허의원이 몸소 다만 며칠이라도 내 곁에 있다 가오. 내 결코 쉬이 이대로 헤어질 순 없소."
그 어머니의 말에 지난 보름 사이 함께 병자를 간병한 딸이 환히 웃으며 역시 간청했다.
오랜만에 새 옷 입고 몸단장도 한 딸은 그 지극한 효심이 아니더라도 백옥같이 눈부신 피부와 상큼상큼 드는 눈매가 딴 사람처럼 아리따웠다.
"의원님은 비단 우리 어머님의 재생의 은인이실 뿐 아니라 저희 집안의 은인이시기도 하십니다. 어머님 청대로 며칠만 더 유하고 가소서."
이어 아들들과 문중의 여러 사람들이 모두 입을 모아 말리는 말을 했고 이에 허준이 이곳에서의 결과를 한시바삐 스승께 알려야 할 의무와 그 동안 잊고 있었던 가족들의 초조해할 정경을 얘기하고 권유에 못이겨 그럼 오늘 하루만 머물고 내일 아침에 떠날 것을 말했다.
그날 낮 허준의 점심상은 큰사랑 성대감과 겸상이 되어 차려져 있었고 그 자리에 함께 초대된 임오근이가 자기들 방에 정경부인과 아들네와 며느리들이 각각 들여놓는 피륙선물들이 거의 한 짐이나 된다고 귀띔하며 이런 사례는 일찍이 스승님도 받은 적이 없노라고 사뭇 흥분된 얼굴을 했다.
호사한 그 주안상 앞에서 성대감은 손수 허준에게 술 한잔을 따라준 후 이제야 허준의 의력에 관해 여러모로 물어왔다.
"스승님 밑에서 7년을 수업했사옵고 제 손으로는 그간 십여 명의 병자를 돌본 적이 있습니다."
"겨우 십여 명의 병자를 본 끝에 이 집에 왔단 말인가?"
저만큼 딴 상을 받고 있던 문중의 늙은 선비 서넛이 새삼 놀란 눈길을 보내왔다.
허준이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고 그 허준에게 성대감이 말을 이었다.
"유의태란 이름을 처음부터 몇 사람이 천거를 했으나 인근에도 이름깨나 내세우는 의원들이 수두룩하여 굳이 산청에까지는 사람을 보내지 아니했던 것인데 아무튼 뒤늦게나마 내가 그대를 알게 된 건 하나의 인연일세."
"황감하옵니다."
"그대의 의술의 정예함을 보니 과시 유의태의 의술도 짐작이 가. 하나 난 그대가 마음에 드네. 내가 겪은 의원들은 작은 공도 크게 부풀려 내세우는 것들뿐이었는데 그댄 젊은 나이에 갸륵한 데가 있어."
"과분한 칭찬이시옵니다."
"몇이던가, 지금 나이가?"
"스물여덟이 되옵니다."
"장가는 들었던가?"
"예 ..."
"양친은 구존해 계시고?"
"편모 슬하올시다."
"자식은?"
"남매가 있사옵니다."
"다섯 식구라 ..."
성대감이 혼자 뇌며 끄덕이다가 다시 허준을 바라보았다.
"사는 집은 마련을 했던가?"
허준이 시선을 들어 그 성대감을 바라보았다.
"집이라 하오시면?"
"아직 남의 수하에 있다 하면 자네의 기량이 어떻다 할지라도 살림에 큰 여축은 없이 사는 게 아닌가 싶어서 묻네. 장만을 했던가, 집은?"
허준이 얼른 대답을 못했다.
"내가 그대에게 꼭 무엇인가 하나 해주고 싶은데 집을 한 채 지어주면 어떻겠나?"
국을 떠 입으로 가져가던 임오근의 숟가락이 정지했고 허준은 멍해졌다.
"이미 포기했던 사람을 살려준 은혜인데 물질로 논한다 함이 되바라진 일이긴 하나 내 정이 또한 그렇지 아니하니 응낙하도록 하게."
임오근의 국숟가락이 허공에서 후들후들 떨었다. 허준이 대답했다.
"오두막이나마 식구가 불편하게 여기지 않는 집에 살고 있사옵고 병자를 구했다 함은 소인의 재주가 아니라 스승님의 가르침 때문이오니 혹 치사를 주실 양이면 스승님 앞으로 보내주소서."
"허어."
하고 성대감이 탄식 같은 감탄의 소리를 냈다.
"공을 윗사람께 돌리는 건 기특한 일이네마는 그대를 지목해 보내준 유의태에게는 따로 또 내가 사의를 전할 터이고 이건 내가 그대에게 따로 내리는 사읠세."
임오근의 목젖이 오르내렸다. 허준도 침묵했다. 자기와 식구들이 몸담고 있는 집은 자기 집이 아니고 변돌석의 집이었다.
7년 동안 춘추로 옷 한벌씩 얻어 입는 외 한푼의 보수도 없이 7년을 버텨오는 자기가 아닌가.
추우나 더우나 떡목판을 이고 이 동네 저 동네 헤매는 어머니와 삯바늘 끝에 우진사댁에서 도둑의 누명을 쓰고 머리끄덩이를 휘둘리던 아내의 고생을 생각하면, 그 어머니와 아내의 뒷바라지 속에 키운 자신의 의술에 대한 보상을 받은들 어떠랴 하는 충동이 허준의 가슴속을 서서히 가로질러갔다.
이윽고 허준의 입이 열렸다.
"듣자오니 이미 정경부인께오서 몇 가지 피륙을 싸주셨다 하시니 소인은 그것으로 고마워하옵고 분외의 사례 일랑은 퇴해주소서."
"허어."
하고 성대감이 또 탄식하며 그 허준을 바라보았으나 허준은 거절하는 까닭을 부연하지 않았다
.
그건 언제던가?
어느날 행색이 가난한 병자를 데려온 낯선 얼굴이 예의 유의태의 말대로 들고 온 몇푼의 돈을 다래끼에 넣었는데 흘긋 그 액수를 짚어본 도지가 발칵 화를 내며 돌아서는 병자의 팔을 잡아채며
"사람이 어찌 이리 뻔뻔해!"
하고 핀잔주어 내보냈는데 또 이런 때야말로 저들의 결백을 내세올 절호의 기회로 여긴 꺽새, 영달 들이 병사 모퉁이를 돌아나가는 병자 가족들에게 우르르 쫓아가
"야 이자야, 우린 흙 파먹고 사는 줄 알아! 손발이 닳도록 지리산 골짜기 헤매며 그 약재를 지은 거라고."
소리소리 지르며 면박과 욕을 퍼부은 사건이 있었다.
'그날이었어!'
그날 부산했던 병사가 조용해지자 유의태는 도지를 불러앉히고 엄히 타일렀었다.
"의원의 즐거움은 병자의 고통을 덜어준다는 데 두어야지 돈을 탐내선 안되느니."
했고 도지가 그 성깔 있는 얼굴로 맞받아,
"남정네는 침을 두 대 맞았고 그 여편네한테는 가슴앓이 약 세 첩을 싸주었는데 겨우 한푼 내놓는 눈치올시다. 그건 의원짓 하는 우릴 숫제 깔보는 심보올시다."
하나 유의태는
"같은 병이라 할지라도 없는 이가 한푼 내놓는 거나 가진 이가 열 냥을 내는 거나 같은 이치가 아니리! 아무튼 의술로 돈이 벌린다는 재미를 맛들이면 큰 의원이 되지 못해."
했다.
'돈에 맛들이면 큰 의원이 되지 못해 ...'
아들에게 내뱉던 유의태의 훈도가 자신도 모르게 자기의 가슴에 언제적부터 자리잡고 있었던가. 성대감의 집 한 채의 제의를 간단히 거절할 수 있는 자신에게 허준은 스스로도 놀라고 있었다. 그건 절망적이던 정경부인의 병을 고쳐낸 자신의 의술이 바로 스승 유의태에게서 왔다는 감사가 새삼스러운 탓인지도 몰랐다.
"유의태가 제법 인물이로고. 문도들에게 그런 기백과 품성도 심어준 걸 보니."
성대감이 좀은 서운한 얼굴로 집 한 채의 제의를 철회했고 오히려 임오근이 바늘방석에나 앉은 듯이 몸을 자꾸 비틀며 허준에게 어떤 눈짓을 계속 보내고 있었으나 허준은 묵묵히 오랜만에 평화로운 점심밥을 마지막까지 비웠다. 갑자기 스승 유의태가 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허준의 코끝이 울고 있었다.
점심상이 물려나가고 허준이 안채 정경부인의 차도를 살피러 건너가자 한 방 가득히 몰려와 병자와 웃음꽃을 피우고 있던 귀부인들이 다시 일일이 허준의 의술을 칭찬하며 문중에 몇 사람 병자가 있으니 보아주고 가도록 부탁을 했고 그러자 정경부인이 그동안 자기로 인해 연일 잠도 못 자며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그런 사소한 병자로 이 사람을 괴롭히려 말게, 하며 함박웃음을 머금었다. 그 밝은 모습은 이미 병자가 아닌 완쾌한 모습이었다.
2
정경부인 방에서 십여 명 여인들의 체취와 진동하는 지분 냄새 속에서 허준이 가까스로 해방되어 안채 중문 밖을 나서자 허준을 기다리고 있던 청지기와 임오근이가 이번에는 성대감의 아들 형제와 그 항렬의 문중 선비들이 따로 술상을 마련해 놓았노라며 기어이 작은사랑으로 데리고 갔다.
이 사람 저 사람 권해오는 미주 속에서 이날 허준은 대취했다. 보름 동안을 옥죄어 있던 긴장으로부터의 해방감, 그리고 형제가 솔선하여 반상을 파탈하여 스스럼없는 분위기를 만들어준 탓이었다.
아니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자기 손으로 위중한 병자를 살려냈다는 자부심과 가슴속에 자리잡기 시작한 의원으로서의 보람 때문이었다.
해가 져서야 그 주연은 끝났고 마련된 비단 이부자리 속에 쓰러진 뒤 허준은 자꾸만 자기를 흔들어 깨우는 임오근의 소리를 들은 듯했다.
귓전에 속삭이는 그 얘기는 성대감댁의 작은댁 누군가가 노자라는 명색으로 두어 뼘이나 될 돈똬리를 가져왔는데 아무래도 동전이 아니고 은전 같다는 소리였으나 잠속으로 떨어져가는 허준의 어렴풋한 의식에는 내일은 산청으로 달려 스승 유의태를 만난다는 기대와 어머니와 아내와 그리고 아이들을 만나리라는 기쁨뿐이었다.
허준은 꿈을 꾸었다.
갑자기 찾아온 행운이 자꾸만 믿기지 않아서 새삼 불안에 떨고 또 갑자기 기뻐 날뛰는 가족들과 함께 웃고 있는 자기의 모습들이, 또 제자들에게 냉담하기가 얼음장 같은 유의태에게선 더 이상 기대를 버리고 돈버는 길로 나서자 유혹해 마지않던 부산포의 얼굴들이 두서없이 그의 꿈속을 비껴가곤 했다.
그 비몽사몽 속에서 허준이 심한 갈증을 느끼며 눈을 뜨자 그 머리맡에는 은제 쌍첩촛대가 켜지고 그 아래 뚜껑 덮인 꿀물 한 사발이 놓여있었다.
그것이 자기는 지금 꿈속을 헤매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주인공임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러나 잠을 깨어가는 허준의 머릿속은 스승 유의태가 이번에 왜 하필 자기를 이곳에 보내주었는지 새삼 그것이 궁금하여 견딜 수 없었다.
모시러 왔던 성대감의 아들 형제에게 병자의 위중한 증세를 들은 그 유의태는 그때 '믿어볼 만한 아이'라는 한마디로 성대감 아들 형제에게 자기를 데려가도록 이르면서 분명히 자기에게도 수삼 일 후에 뒤따라가마 했었던 것이었다.
'한데도 임오근을 보내어 하회를 알아오라며 스승님은 오지 않았어 ... 왤까?'
결과는 성공이다. 그러나 일이 실패했을 경우, 뒤따라오마 해놓고 아니 오는 유의태 또한 문책을 못 벗어날 것은 자명한 일인데 유의태는 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저 냉랭한 사내는 이번 일에 허준 자기의 침술이 성공할 것을 미리 꿰뚫어보고 있었단 얘기일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허준의 가슴이 두방망이질치기 시작했다.
'수제자'
친아들인 도지를 젖혀놓을 수야 없을 테지만 이번 일의 성공으로 허준 자기는 임오근을 젖혀놓고 수제자의 상징인 병부잡이가 될지 모른다.
그건 그냥 병부의 정리가 아니다. 유의태가 출타할 때면 도지와 함께 직접 병자들을 다루어도 되는 권한의 위임도 뜻하는 것이다. 순간 허준의 귓속에서는 과거 유의태가 한 또 한마디가 왕왕 울리기 시작했다.
"비인부전이랄밖에!"
옛날 부산포가 십여 년 허송세월을 억울해하여 이젠 자기도 나이로 보아서도 더 이상 제자 노릇을 할 수 없으니 고약이 됐든 무엇이 됐든 의원으로서 한 가지 살길이 될 확실한 재주를 전수해주십사 애걸했을 때 유의태는 이 말 한마디를 내뱉고 방문을 닫아버렸던 것이다. 부산포도 다른 제자들도 처음 그 뜻을 몰라 쑥덕거리는데 그 부산포를 달래러 술상을 차려낸 자리에서 도지가 그 말 뜻을 설명해줬던 것이다.
'비인부전'이란 중국의 서성 왕희지가 자기의 제자들에게 했던 말로서 스승의 안목으로 사정하여 딱 합당한 인물이 아니면 함부로 예나 도를 전해줄 수 없다는 사제간의 냉엄한 도리를 일컫는 경구임을.
'그건 곧 그 적임자이면 수업 기간의 다과에 구애됨이 없이 수제자로 발탁할 수도 있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눈앞에 임오근의 처절한 눈빛이 다가들었으나 그러나 허준은 스승의 허락하에 마음놓고 병자를 볼 수 있는 수제자의 자리를 뜨겁게 갈망하는 자기를 깨달았다.
'비인부전'
허준이 다시 그 말을 뇌는데 방문 밖에 인기척이 났고 만석이라 불리는 안채 늙은 하인이 들어와 정경부인께서 안채에 저녁 진지상을 차리시고 그가 잠 깨기를 기다리고 계시노라는 전갈이었다.
>비인부전...
>
>도해님에 대한 좋은 생각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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