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인산의 가르침이란 무엇일까?
오늘날에 인산의 가르침을 따르기 보다는 오히려 ‘인산’이란 ‘이름’과 ‘형상’을 그의 "가르침"보다 더 얽매이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에고(ego)를 벗어 던진 ‘완전한’ 존재인 ‘인산’을 인산의 차원에서 해석하지 못하고,
에고를 가진 자들이 자기의 개체의식에 매어 두기 때문입니다.
에고‘ego’가 무엇이라고 고민하십니까?
우리 생각보다 에고는 더더욱 뿌리 깊고 거대한 것입니다.
진실로 깨달아 자기가 이 근본 우주와 하나이고 한 몸일 수밖에 없음을 체험(증득)한 인산할아버님에게는 모든 것이 ‘나’요 내 몸이요, 내 피였던 것입니다.
사실 깊이 고민해 보면 인산이란! '이름'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할아버님을 만나 그와 하나가 되었던 지극히 순수한 한 사람을 부르는 대명사(代名詞) 주소에 불과합니다.
문제는 그 주소에 과연 무엇이 있느냐 바로 그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핵심 알맹이를 만나지 못하고(증득) 모르는 채, 인산이라는 남들의 해석이나 믿고 있다면, 그 사람은 매일 밤 똑같은 동화나 전설을 반복해 들으면서 좋아하는 어린애와 똑같습니다.
문제는 '인산'이 이 세상에 과연 무엇을 나타내고 있느냐, 바로 이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산’이란 이름은 하나의 주소(住所)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주소에 과연 무엇이 있습니까? 인산은 개체를 버리고 우주(전체)와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의 가슴속에서 생생하게 느껴집니까?
이것은 체험(증득)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당신이 제 이름을 안다고 과연 저를 안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까? 이름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가 말씀하시고 듣는 나’ 이것이 그분의 가르침이 아닌 ‘그가 말하고 증득 체험하는 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의 이름, 말과 글에 매이지 말고, 그분의 뜻이 과연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아무리 글과 말에 매이고 인산을 외쳐도 그것은 본질적으로 “국속에 하루 종일 잠겨 있는 국자가 실제 국 맛을 전혀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을 모르면 그냥 제 마음과 관념의 유희 속에서 잘 놀았을 뿐입니다.
이치가 그러한데도 그저 겉으로 드러난 이름과 그 형상만을 좇으며 깨어나지 못한 채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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