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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리(Barley)(2010), 405*495㎜2 추억(2011), 1710*970㎜ 3 1994년 대영박물관에 소장된 귀중품 함 작은 숲 4 문갑39음양39(1965), 1670*812㎜, 통영옻칠미술관 소장 |
“옻칠을 영어로 이렇게 쓰는군요.” “제가 만든 말입니다. 미국에 살 때 보니 대부분의 미국 사람은 옻칠을 래커(lacquer) 칠로 오해하더라고요. 일본 옻칠과 구별하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고. 물론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옻칠과 화학 칠인 캐슈(cashew)를 구별해 내는 사람도 거의 없지만. 허허.” 올해는 그가 옻칠을 시작한 지 60년이 되는 해다. 육십갑자가 한 바퀴를 도는 동안 그는 오로지 옻칠 하나만을 붙들고 살아왔다. 그에게 옻칠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왜 아직도 그 질긴 인연의 끈을 움켜쥐고 있는 것일까.
-1951년 통영에 설립된 나전칠기 기술원양성소 1기생입니다. 전쟁 통에 어떻게 양성소가 세워졌고 또 어떻게 들어가게 됐나요.
“당시 피란 온 사람 중에 초대 국립박물관장을 지낸 김재원 선생 같은 분들이 ‘전통문화의 맥을 이어야 한다’며 학교 건립을 제안하셨죠. 마침 집안 아저씨가 좋은 기회라며 입학을 권하셨고요. 처음엔 기술을 배우겠거니 했는데 소묘 데생 등 서양미술 기초부터 2년간 공부했습니다. 홍익대에 공예학부를 만든 유강렬, 일본 태평양 미술학교에서 회화를 전공한 장윤성, 일본에서도 칠예가로 명성을 떨친 강창원, 나전칠기로 인간문화재가 되신 김봉룡 선생님 등 최고의 강사진으로 짜였습니다. 여기에 이중섭 선생과 초정 김상옥 선생 같은 분도 가끔 특강을 했죠.”
-졸업 후 양성소에서 다시 학생들을 가르치셨죠.
“졸업 후 부산의 일반계 고교에 다니면서 밤에는 옻칠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어요. 미군들이 자개 명패나 자개 앨범을 좋아하던 시절이었죠. 그런데 전쟁이 끝나고 선생님들이 서울로 돌아가게 되자 김봉룡 선생님이 절 부르신 겁니다. 분야를 가리지 않고 아는 대로 가르쳤죠. 62년에 새뮤얼 D 버거 주한 미국대사가 양성소를 찾았는데 설명자료 정리하는 일을 제가 맡게 됐어요. 일본식 용어를 우리말로 바꾸고, 제작 공정도 정리하고. 그 자료가 김봉룡 선생님 무형문화재 지정 때 사용됐죠.”
-그러다가 63년 서울로 올라오셨죠.
“새로운 기회를 찾고 싶었습니다. 친구가 하는 자개 옻칠공장에서 일을 도우며 의식주를 해결했죠. 그러면서 내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첫 작품인 자개 옻칠 문갑으로 그는 그해 대한민국 미술대전(국전)에서 공예 부문 최고상인 문교부장관상을 거머쥐었다. 이어 66년까지 3년 연속으로 특선을 했다. 첫 작품을 구입한 사람은 로비스트로 잘 알려진 박동선씨. 김 관장은 “상금이 2만원이었는데 작품 가격은 그 두 배 정도를 줬다”며 “덕분에 마포구 창전동에 작업실이 있는 집을 얻을 수 있었다”고 술회했다.
서른하나에 국전 추천작가가 된 그는 홍익대에 강사로 초빙됐다. 이어 숙명여대로 자리를 옮긴 그에게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다. 73년 튀니지 정부가 나전칠기 전문가를 보내 달라고 정부에 요청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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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Balance and Accord IV?(2011), 1820*1170줡 6 Balance and Accord V?(2011), 1820*1170줡 |
-어째서 나전칠기 전문가였습니까.
“튀니지 고위 공무원이 한국에서 나전칠기를 사 갔는데 자기들도 그런 것을 만들어 보고 싶으니 전문가를 보내 달라는 것이었어요. 백골(목기)과 나전, 옻칠 분야 전문가 3명을 요청했는데 정부에서는 고심하다가 세 분야를 모두 아우를 수 있는 저 하나를 보낸 것이죠. 1년6개월 동안 가르쳤습니다. 틈이 날 때마다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돌아다녔는데, 그때 예술적 영감을 많이 받았죠. 방식은 전통이되 내용은 현대적이어야 한다는 내 나름의 방향성도 잡았지요.”
귀국 후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그는 자신의 예술혼을 불태웠다. ‘김성수 상감기법’이라는 명칭의 목분 상감기법 등을 선보였다. 98년 정년 퇴임 후에는 새로운 시장에 대한 관심 때문에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옻칠로 그림을 그리는 옻칠 회화(Ott painting)를 창안해 LA와 뉴욕, 베이징, 그리고 서울 예술의전당에서도 대대적으로 전시했다. 대영박물관, 중국 베이징공예미술관, 일본 시가현립미술관, 미국 하와이주립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등이 그의 작품을 소장했다.
그러던 중 가슴 아픈 소리를 들었다. 고향 통영에서 옻칠이 자꾸 소외되고 있다는 얘기였다. 그는 다시 짐을 꾸렸다. 그리고 바다가 보이는 고향 산허리에 사재를 톡톡 털어 미술관을 지었다. 2006년이었다. 한국 옻칠이 도대체 무엇이냐고 물어볼 그 누군가에게 설명해 줄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옻칠이 뭐가 좋습니까.
“옻 이상의 재료는 지구상에 없습니다. 벌레도 끼지 않고 썩는 것도 방지해 줍니다. 습도가 높으면 수분을 빨아들이고 낮으면 뿜어내고요. 금속·사기·목재·섬유 할 것 없이 다 붙일 수 있는 접착력이 있죠. 쇠 장식에 칠하면 녹이 안 슬고 가죽에 칠하면 부드러운 결을 유지시켜 줍니다. 옻을 칠하면 윤기와 색깔이 오래될수록 은은하고 우아해져 깊은 맛을 내죠. 고려시대 대장경과 그 경을 넣어 놓던 경함도 다 옻칠을 했습니다. 한마디로 금보다 훨씬 더 귀하고 사람에게도 좋은 재료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나라에서는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을까요.
“정말 좋은데 그 좋은 물성을 너무 많이 잊었습니다. 일제와 전쟁을 거치며 호된 가난을 겪었잖아요.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옻칠은 귀했습니다. 그래도 다들 집에 옻칠한 상 하나 정도씩은 갖고 있었죠. 그러던 게 화학 칠이 싸고 번쩍번쩍하니까 좋은 줄 알고 다 돌아선 것이죠. 화학 칠은 냄새가 많이 나는데 이게 옻칠 냄새인 줄 아는 분이 많습니다.”
-값이 꽤 비싸다죠.
“한 관이 3.75㎏인데 래커는 한 관에 1만원, 옻은 원주 상품 현 시세로 230만원입니다. 옻은 7월에서 8월 중 채취하는 것을 상품으로 치는데 한 나무에서 아주 조금씩밖에 나오지 않아요.”
-옻칠한 제품 값이 비싸서 안 팔리는 걸까요.
“팔려고 해도 팔 곳이 없어요. 국내에서는 옻칠한 것과 캐슈 칠한 것을 막 섞어 버리니 상도덕도 없고요. 일본에서는 그렇지 않거든. 백화점에 가면 오리지널 전통문화를 팔 수 있는 곳이 아예 정해져 있어요. 글로벌 시대인데 우리도 세계에 자랑할 만한 것이 있어야 하지 않나요. 그런데 생업이 어려우니 아무리 가르쳐도 결국 이 분야를 떠납디다. 최근 배재대가 학교 구조조정 차원에서 국내 유일의 칠예과를 없애기로 했다고 하더라고요, 참….”
-옻이 오른 적은 없습니까.
“세 번 있습니다. 얼굴이 퉁퉁 붓더라고요. 그래도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옻이 세 번 오르면 여자는 미인이 되고 남자는 흉터가 안 생긴다’는 말이 있는데 그 뒤로는 문제가 없었어요.”
그의 옻칠 인생 60년을 되새기는 전시가 6월 29일부터 7월 12일까지 서울 인사동 서울아트센터 공평갤러리에서 열린다. 국내 옻칠 전문가 80명이 대거 참가했다. 우선 중요무형문화재 제10호 나전장 이형만, 중요무형문화재 제113호 칠기장 정수화, 대한민국 칠기명장인 권영진·김규장·손대현·송원섭·임충휴씨 등 전통 장인들이 나섰다. 여기에 김설 숙명여대 공예과 교수, 안덕춘 전주대 디자인학부 교수, 오구환 동아대 공예학과 교수, 정영환 대구대 공예디자인전공 교수, 정용주 영남대 생활제품디자인학과 교수 등 대학교수와 학생, 옻칠 대중화에 뜻있는 사람들도 작품을 내놓았다. 무엇보다 전통작가와 학계가 함께 힘을 모았다는 점이 흐뭇해 보였다. 여기에는 김 관장이 전통과 현대라는 두 부류를 한데 묶어 90년 결성한 한국칠예가회가 그 바탕에 있다.
-이번 전시의 특징은.
“제가 걸어온 길 외에 전통 옻칠 공예, 현대 옻칠 공예, 옻칠 회화, 옻칠 장신구, 그리고 옻칠 인테리어 등 다섯 가지 분야로 구분해 전시를 보다 입체적으로 구성했습니다. 다양한 옻칠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뭘 하고 싶으십니까.
“교육관을 만들어 더욱 많은 사람에게 옻칠을 제대로 가르쳤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가난해도 물질보다 정신이 앞서 가면 사람은 변질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가짜 칠이 옻칠을 이기는 세상이거든요.”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실 생각입니까.
“크게 세 가지입니다. 우선 옻칠 회화로 세상을 놀라게 할 수 있는 아티스트, 둘째는 전통 옻칠을 계승할 수 있는 명장, 셋째는 옻칠 대중화에 앞장설 달인입니다. 이 세 축을 중심으로 옻칠이 한국의 대표문화가 됐으면 합니다. 이번 전시의 제목이 ‘다시 찾은 한국 옻칠’인 것도 그 때문입니다.”
통영 정형모 기자 hyung@joongang.co.kr, 통영 사진 최정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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