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속으로] 민중의술 전도 앞장 울산지법 황종국 부장판사
어릴 적 어머니는 속이 편치 않은 나에게 엄지손가락을 실로 묶어 따주셨다.
바늘에 콧김을 흥흥 분 뒤 손가락을 ‘톡’ 따면 검붉은 피가 송송 솟아나곤 했다.
처음에는 “이게 무슨 소용이 있다고…”라며 마뜩찮아 했지만 참으로 신기하게도 속이 편안해졌다. 그리고 그후 체하기만 하면 엄지손가락을 어머니에게 내맡기곤 했다. 이런 기억은 비단 나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할머니·어머니의 약손으로 편안해졌던 배앓이를 기억할 것이다. 그랬다. 적어도 20~30년 전만해도 이런 신비로운 이야기들이 이 땅에는 있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 곁에는 그 신비로웠던 놀라움은 사라지고 없다. 전설이 되고,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옛이야기로만 존재한다.
세칭 ‘민중의술’이라 불리는 지혜와 영험, 비방들은 어머니, 할머니, 할아버지의 사라짐과 더불어 점차 이 땅을 떠나고 있는 것이다.
울산지법의 황종국 부장판사(53). 민중의술과는 다소 거리가 먼 듯한 직업을 가진 황판사는 이런 사라짐을 누구보다 안타까운 눈으로 지켜본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안타까움을 속으로만 재우지 않고 판결로,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는 사람이다.
“1962년 제정된 의료법은 이 땅의 민중의술에 비수를 들이댔습니다. ‘의료’가 무엇입니까. 사람의 건강을 지키고 생명을 살리는 일이잖습니까. 그런데 사람 살리는 일에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되고 하는 장벽을 쳐놓는다는 것은 수긍할 수 없습니다.”
그는 민중의술이 이 땅에서 사라지게 한 주범으로 불법이라는 ‘주홍글씨’를 이마에 찍어버린 의료법을 지목했다. 수천년 내려온 민중의술에는 한약을 조제하는 약제와 침구, 수기, 사혈, 접골 등 다양한 분야가 함께 존재했다.
각 분야들은 저마다의 전통과 경험으로 쌓인 노하우를 환자의 증세에 따라 적절하게 시술됐다.
지금의 서양의학처럼 세분화돼 저마다의 전문영역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의료법은 이를 깡그리 절멸시켰다. 오로지 살아남은 것은 약제를 주로 했던 한의사뿐이다.
의료법 25조 1항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의료인이 아니면 누구든지 의료행위를 할 수 없으며 의료인도 면허된 이외의 의료행위를 할 수 없다’고.
이것은 무엇인가. 사람 살리는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을 지목해 놓은 것에 다름 아니다. 그는 이를 ‘의사(한의사 포함)에 의한 의료행위 독점제도’라고 정의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 조항이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는 두 가지 전제가 필요합니다.
우선 환자나 가족에게 모든 치료 방법이 공개돼야 합니다.
그래야 선택을 할 수 있죠.
또 의사가 모두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질병을 고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현재 양의에서 고칠 수 있는 병은 전체의 20~30%에 불과합니다. 모든 질병을 치료하지도 못하면서 자신들만이 치료할 수 있도록 한 것은 생명을 놓고 벌이는 그들만의 리그일 뿐입니다”라고 했다.
그는 다른 분야에도 독점이라는 게 있지만 그것과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의술은 분명 달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간의 가장 고귀한 가치, 생명을 살릴 수 있다면 그 어떤 제한이나 가치관이 끼어들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6년 교육과 자격증이 죽어가는 사람을 살릴 수 없다는 것이 자명한데, 그리고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다른 방법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데 이를 못하게 가로막는다는 것은 살인행위와 무엇이 다릅니까.”
설령 민중의술이 모든 사람을 구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적어도 의사나 한의사보다 더 높은 완치율을 보여주고 있고 분명 살릴 길이 있는데 이를 방치하는 것은 지독한 자신들만의 이익챙기기 외에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실제 ‘민중의술’은 누구나 얼마간의 교육과 경험을 쌓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골치아픈 의대를 나올 필요도, 자격증을 딸 필요도 없다.
게다가 약간의 지식만 갖추면 이 땅에 널려있는 약초들을 얼마든지 치료와 예방에 이용할 수 있다. 바로 의술의 대중화가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것이다. 혹 의사와 한의사들은 이것, 대중들이 스스로를 치료하는 그것을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의료법은 의술인 모두를 전과자로 만들었다. 황판사는 실제 의사들이 포기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고도 법정에 서야 하는 이 아이러니를 수없이 보아왔다. “번번이 고발당합니다. 대부분 의사들과 한의사들이 고발하죠.
자신들이 먹을 파이가 적어진다는 이유도 있지만 민중의술이 갖는 편리함과 신비로운 효능 때문이기도 합니다.” 심지어 널리 알려진 침술사에게 침을 배우고, 자신이 치료를 받고 나은 뒤에 고발하는 후안무치한 경우도 심심찮게 일어난다는 게 황판사의 지적이다.
그래서 황판사는 부산지법 의료전담 판사로 재직하면서 무면허 침구사에게 청구된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병을 잘 고치는 사람이 진정한 의사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 이후 그는 무면허 민중의술인들을 법의 올가미로부터 수없이 구해내기도 했다.
황판사가 이렇게 민중의술을 살리기 위해 백방으로 뛰는 이유는 간단하다. 스스로 효과를 보았을 뿐 아니라 직장 동료, 이웃, 친구, 가족들이 실제로 난치병을 간단하면서도 값싼 방법으로 완치되는 것을 직접 목도했기 때문이다.
“민중의술을 돌팔이라고, 믿지 못하겠다고, 비과학적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제대로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과학에 대한 맹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민중의술은 수천년간의 임상실험을 몸소 겪으면서 체계적으로 증명된 가장 오래되고 완벽한 경험의 산물입니다.”
그래서 그는 지금 늦었지만 민중의술이 국민속으로 당당하게 다가서게 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1962년 이후 처음으로 음지에 갇혀있던 이 땅의 신의와 명의들이 햇볕속에서 민족의술의 당당함을 보여주려 하는 것이다. 바로 민중의술 살리기 전국연합의 결성이다.
“처음에는 긴가민가했죠. 하지만 지금 가히 폭발적인 힘을 느낍니다.
또 너무도 당연한 일이죠. 수천년 내려온, 그것도 가장 쉽고 간단하게 치료할 수 있는 민중의술을 그동안 내팽개쳤던 부끄러움을 이제야 조금은 알게 된 것일까요.”
이미 영남지방을 필두로 서울·경기, 대구·경북지부가 결성됐고 3월 안에 광주·전남, 전북지부가 결성될 예정이다. 또 강원, 충청지부가 만들어지면 곧바로 4월 중에 서울 여의도 둔치에서 ‘민중의술’의 힘찬 깃발을 매달아 올릴 계획이다.
“가장 큰 일은 물론 합법화를 위한 싸움이지만 지금까지 깨닫지 못했던 민중의술을 널리 알리고 홍보하는 일에 집중할 생각입니다. 무엇보다 대(代)를 이어가는 것이 급선무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또 의료정책 개혁방향을 제시하는 운동과 더불어 국회, 청와대 등에 정책적인 대안을 세워주도록 청원서를 제출할 예정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의사와 한의사들의 ‘인술’에 기초한 양심에도 호소했다. 그는 “세계의 의료 추세가 동양의술이 우위를 점하는 통합의학으로 가고 있고 중국, 일본의 의술이 세계표준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라며 “이제라도 침묵에서 벗어나 민중의술의 필요성과 우수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렇지 못하다면 이는 아둔함이나 소아병적 처세를 떠나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사람으로서 양심의 문제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한가지 제안했다. “방송 3사가 생중계하는 자리에서 같은 증세를 보이는 환자를 놓고 의사, 한의사, 민중의술가가 치료를 해보자”는 것이다.
지금도 말기 암과 당뇨합병증, 각종 성인병으로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위협받고 있다. 언제까지 이들 생목숨이 인간의 가치를 가장 소중하게 여긴다는 이 땅 대한민국에서 죽어가게 만들 것인가. 설령 민중의술이 모든 것을 해결하는 도깨비 방망이는 아닐지라도 한번쯤 기회를 주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야 진정 사람이 살 수 있는 ‘사람의 땅’이 아닐까.
〈울산|배병문 여론독자부장 사진 서성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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