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보다 둔하다고 한 게 농담이 아니었어.'
이상한 젊은이와 노인들
소는 강원도로 들어선 후 북쪽으로 길을 잡아 높고 아름다운 산에 이르렀어요. 수려하게 솟아 있는 봉우리마다 파릇파릇 푸른 싹이 트고 봄꽃이 수줍게 피어나고 있었어요.
'여기는 금강산이 아닌가!'
그래요. 구봉의 소가 찾아간 곳은 민족의 영산 금강산이었습니다.
소는 굽이굽이 골짜기를 따라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길이 좁고 험했지만 소는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어요. 한참을 가던 소는 이번엔 벼랑길로 접어들었어요. 보기만 해도 눈이 아찔한 깎아지른 벼랑이었지요. 길이 아주 좁고 험해서 사람 한 명이 다니기도 힘든 곳이었어요. 그렇지만 소는 아랑곳하지 않고 성큼성큼 나아갔어요.
한참을 그렇게 가는데 맞은편에서 말을 타고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어요.
'이 깊은 산중에 웬 사람일꼬? 이 험한 길에 말을 타고 다니다니 신기한 일이야.'
잠시 후 두 사람은 절벽 길에서 딱 마주쳤습니다. 서로 마주치고 보니 참 곤란한 일이 생겼어요. 길이 워낙 좁아서 서로 비켜갈 수가 없었답니다. 그렇다고 뒤돌아갈 엄두도 낼 수 없었지요. 소와 말도 서로 멀뚱멀뚱 바라맘 보았어요.
'어허, 이 일을 어쩐담?'
율곡이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데, 그 젊은이가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어요. 그는 말의 다리를 한 손에 두 개씩 모아 쥐더니 말을 머리 위로 번쩍 들어올리고서 한쪽으로 바짝 비켜섰습니다. 덕분에 율곡은 소를 탄 채 길을 계속 갈 수 있었지요.
'참 이상한 젊은이야.'
이렇게 생각하며 얼마쯤 길을 가던 율곡은 속으로 '아차!' 했어요. 젊은이를 데리고 가라고 한 구봉의 말이 뒤늦게 떠오른 거예요.
얼른 뒤를 돌아보니 젊은이는 벌써 저만치 멀어져 있었어요. 율곡은 급히 손나팔을 만들어 젊은이를 불렀습니다.
"이보게 젊은이, 나 좀 잠깐 보세나!"
그러자 젊은이는 말없이 말을 멈추고는 아까처럼 말을 들어올려 방향을 바꾸었어요. 그리고는 벼랑길을 타고서 율곡에게로 다가왔습니다.
"나하고 어디 좀 같이 가세나."
그러자 젊은이는 말없이 율곡의 뒤를 따랐습니다. 아주 입이 무거운 젊은이였어요.
두 사람이 소와 말을 타고 험한 산길을 한참 올라타고 있을 때, 어디선가 물 흐르는 소리가 졸졸 들려오기 시작했어요. 앞으로 나아갈수록 그 소리는 점점 커져서 '쏴쏴쏴' 하고 들렸어요.
절벽 모퉁이를 막 돌아섰을 때 율곡은 숨이 멎는 것 같았어요. 지금껏 보지도 듣지도 못한 아름다운 경치가 펼쳐져 있었지요. 한쪽에 폭포수가 은빛 물살을 휘날리며 아득히 떨어져 내리고,양쪽 등성이에는 산철쭉 무리가 푸른 새싹들과 어울려 망울망울 꽃을 피워내고 있었어요. 폭포 옆쪽에 넓다란 바위가 멍석처럼 펼쳐져 있고, 그 옆에는 수백 년은 됐을 법한 복숭아나무가 화사하게 꽃을 피워 분홍빛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습니다.
그 꽃 그림자 아래 너른 바위에는 흰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노인 넷이 앉아서 바둑을 두고 있었어요. 율곡과 젊은이는 조심스럽게 그리로 다가갔지요. 하지만 노인들은 바둑 두는 일에만 열중할 뿐이었어요.
율곡은 뛰는 가슴을 진정하며 조심스레 인사를 올렸어요.
"문안 드리겠습니다."
그제서야 한 노인이 돌아보면서 말을 던졌어요.
"그래, 속세 사람이 여기는 웬 일인고?"
율곡은 소매 속에서 구봉이 써준 편지를 꺼내 노인에게 건넸어요. 노인은 편지를 읽고 나서 다른 노인들에게 말했습니다.
"이거 문곡이 보낸 편지구먼."
그 말에 율곡은 비로소 구봉이 문곡성의 정기를 받은 인물임을 깨달았어요. 문곡성의 기운을 띠고 태어나면 큰 학자가 된다고 하지요.
다른 노인이 말했어요.
"그래, 문곡이 뭐라 적었는가?"
"장차 조선에 닥칠 왜란을 막아 달라는구먼."
그러자 노인들이 돌아가며 한 마디씩 거들기 시작했어요.
"그거야 하늘의 뜻인 걸 우리가 어쩐단 말인가?"
"그래도 문곡의 부탁인데 모른 척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나라에서 구봉이나 김덕령 같은 인재를 제대로 쓰면 몇 달 안에 전쟁이 끝나련만……."
"이러면 어떻겠나? 왜란을 15년에서 8년을 줄여준다면?"
"그게 좋겠군. 아무래도 7년의 전란은 피할 수 없어."
노인들의 대화를 유심히 듣고 있던 율곡은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 나라에 장차 왜란이 나서 7년이나 전쟁을 하게 된단 말인가.'
그때 다시 한 노인들이 말을 꺼냈습니다.
"그런데 누구를 시켜서 7년 만에 왜란을 끝내게 한단 말인가?"
고민스러운 듯 수염을 쓰다듬던 노인이 문득 말고삐를 붙들고 서 있는 젊은이를 가리키며 소리쳤어요.
"옳지! 저기 인재가 있구먼!"
노인들은 종이를 꺼내더니 머리를 맞댄 채 열심히 무언가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리 접고 저리 접기를 한참을 하더니 마침내 완성이 됐는지 젊은이를 불러서 주었어요.
"여보게 젊은이. 이걸 받게."
노인들이 만든 것은 물에 띄우는 배였어요. 그런데 그 모양이 아주 특이했습니다. 용처럼 생긴 머리가 앞쪽에 솟아 있고 거북등 모양의 배 지붕에는 송곳이 삐죽삐죽 솟아 있었어요. 배 옆구리에는 여러 개의 노가 삐쳐 나와 있었지요.
그것은 바로 거북선의 모형이었습니다.
지금 이 배를 받아든 젊은이는 과연 누구일까요? 그래요. 그는 바로 이순신이었습니다. 임진왜란이 나자 거북선을 거느리고 바다에서 왜군을 크게 무찔러 민족을 구한 충무공 이순신 장군 말이에요.
임금 앞에 나아간 송구봉
율곡은 금강산에 다녀온 후 큰 시름에 잠겼어요. 하루 빨리 일본의 침략에 대비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지요. 그러나 조정에서는 신하들이 서로 편을 갈라 싸움을 벌이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율곡은 선조 임금에게 기나긴 상소문을 올렸습니다. 송구봉의 높은 인품과 학식에 대하여 자세히 쓰고 나서 구봉에게 벼슬을 내려 큰 일을 맡겨야 한다고 호소했지요. 그 상소문을 읽고 감동한 선조는 송구봉을 불러들이라는 어명을 내렸습니다.
임금이 송구봉을 불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조정에는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어요. 신분이 천한 사람을 조정에 들여서는 안 된다는 상소가 빗발쳤지요. 구봉을 추천한 율곡에게도 공격이 쏟아졌지요. 하지만 선조 임금은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송구봉은 임금을 만나기 위해 대궐에 들어섰습니다. 그는 양쪽에 신하들이 늘어선 사이로 뚜벅뚜벅 걸어가 임금에게 절을 올렸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었어요. 임금님 계신 곳에 들어올 때부터 송구봉은 눈을 지긋이 내려감고서 뜨지를 않았습니다. 임금의 명으로 열굴을 들었을 때도 여전히 눈을 감은 채였지요.
신하들이 웅성거리는 가운데 임금이 말했습니다.
"여봐라. 그대가 송구봉인고?"
"그렇습니다."
"한데 괴이한 일이로다. 어찌하여 눈을 감고 있단 말인고? 눈을 뜨고 이쪽을 보라."
그러자 송구봉이 말했어요.
"전하께서 놀라실까 염려되옵니다."
"놀라다니. 어서 눈을 뜨거라."
그 말에 송구봉은 감았던 눈을 번쩍 떴습니다. 순간 그 눈빛이 얼마나 휘황찬란하던지 임금은 물론 신하들이 모두 다 깜짝 놀라서 고개를 젖히면서 목을 움츠렸어요.
선조 임금은 놀란 가슴을 겨우 쓸어내리고 송구봉에게 나라 형편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그러자 송구봉이 말했습니다.
"지금 나라가 태평하다고들 하나, 그렇지 않습니다. 못된 벼슬아치들 때문에 임금의 덕이 백성에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바다 건너 왜적이 조선을 넘보고 있습니다. 상감께서는 당파싸움을 뿌리뽑고, 왜적의 침략에 대비하셔야 합니다."
임금의 덕이 백성에게 미치지 못한다는 말에 선조의 눈이 둥그래졌어요. 당파를 뿌리뽑으라는 말에는 신하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지요. 잠시 후 신하들이 앞다투어 송구봉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전하, 저자가 지금 태평한 나라에 쓸데없는 풍파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저 무엄한 자를 지금 당장 내쫓으십시오."
"전하, 내쫓는 것으로 부족합니다. 당장 옥에 가두고 형벌을 내려야 합니다."
그때 선조 임금은 신하들이 당파 싸움을 일삼는 데 넌더리가 나 있었어요. 그래서 송구봉의 말이 솔깃하게 들렸지요. 그러나 신하들이 벌떼같이 일어나서 구봉을 벌하라고 하는 데는 당할 재간이 없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율곡이 나서서 아뢰었습니다.
"전하, 송구봉의 말이 맞습니다. 당파를 누르고 외적의 침입에 대비해야 합니다."
그러자 신하들은 입을 모아 이율곡을 공격하기 시작했어요. 소란은 도무지 끝이 없었지요. 임금은 그만 절레절레 고개를 젓고 말았어요.
"다들 그만두시오. 내 오늘 일은 다 없었던 것으로 하리다."
율곡의 죽음과 임진왜란
송구봉에게 나라 일을 맡기려던 뜻은 물거품이 되자, 율곡은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습니다.
"앞으로 이 나라를 어찌한단 말인가?"
그러자 구봉이 말했습니다.
"이게 다 하늘의 운수인 걸 어쩌겠는가. 자네라도 나서서 힘쓰도록 하게나."
"물론 최선을 다하겠지만 혼자 힘으로 될 일이 아니라서…. 게다가 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네."
"큰일은 큰일이로군."
이율곡은 그 뒤에도 틈만 나면 임금에게 왜적의 침입에 대비해야 한다고 아뢰었습니다. 십만 명의 병사를 길러야 한다는 '십만양병설'을 열성을 다해서 외쳤지요. 그렇지만 그의 주장은 신하들의 당파 싸움에 밀려 끝내 실현되지 못했어요.
어느 날 이율곡은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말을 남긴 채 저세상으로 떠나고 말았어요. 율곡이 죽자 송구봉은 하늘을 향해 꺼이꺼이 통곡하고 나서 살던 집을 떠나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나서 몇 년 후 일본은 수십만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 땅을 침략했습니다. 임진왜란의 시작이었지요. 임금과 신하들은 그제서야 이율곡과 송구봉의 말을 듣지 않은 걸 후회했지만, 엎질러진 물을 주워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조선땅에 들어온 왜군은 조선의 인재들을 잡아죽이려고 눈이 벌갰어요. 그들은 송구봉이 제갈공명만큼이나 뛰어난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고서 구봉을 잡으려고 눈에 불을 켰습니다. 구봉이 나라 일을 맡으면 큰일이기 때문이었지요.
왜장은 칼을 잘 부리는 자객들을 모아놓고 조선 땅을 샅샅이 뒤져서라도 송구봉을 찾아 없애라고 명령했어요. 명을 받은 자객들이 사방으로 흩어졌지요.
그때 구봉은 금강산 깊은 산중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소를 타고 산을 오르내리는 게 일이었지요. 그날도 시름에 잠겨 산을 내려오는데, 갑자기 양손에 칼을 든 사람 둘이 길을 가로막았습니다. 왜장이 보낸 칼잡이였어요.
칼잡이들은 한꺼번에 몸을 날리며 구봉에게로 달려들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에게 당할 송구봉이 아니었지요. 재빨리 칼을 피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양손으로 두 칼잡이의 가슴을 잡아서 멀리 내던졌어요. 칼잡이들은 저만큼 나가떨어져 버렸습니다.
왜적은 송구봉을 없애는 데 실패했지만, 염려했던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전쟁이 다 끝나도록 구봉에게는 나라 일이 맡겨지지 않았지요. 김덕령 같은 영웅을 역적으로 몰아 죽인 조정에서 송구봉을 불러들일 리 있겠어요.
그러는 사이에 이 나라는 왜적에게 짓밟혀서 온통 쑥밭이 되고 말았어요. 백성들이 스스로 의병이 되어 왜적과 맞섰지만,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지요. 그러기를 장장 7년, 거북선을 거느린 이순신 장군의 눈부신 활약에 힘입어서 비로소 왜적을 몰아낼 수 있었습니다.
혼쭐난 이여송
임진왜란이 한창일 때, 조선 땅에는 이여송이 이끄는 명나라 구원병이 들어왔습니다. 명나라 군사는 왜군과 맞서 싸우기도 했지만, 나쁜 짓도 많이 했어요. 힘없는 백성들의 재물을 빼앗고 부녀자를 잡아가기도 했지요.
왜란이 끝나갈 무렵, 명나라 장수 이여송은 아주 음흉한 계략을 품고 있었어요. 조선의 수려한 강산과 기름진 땅을 보고는 이번 기회에 조선 땅을 차지해 버려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지요.
마침내 전쟁이 끝나자, 조정에서는 이여송과 명나라 군대를 위해 평양에서 큰 잔치를 베풀었어요. 이여송은 높은 자리에 앉아 거드름을 피우며 조선의 신하들이 따라주는 술을 들이켰어요. 그러면서 속으로 한껏 그들을 비웃었습니다.
'어리석은 놈들. 이제 곧 내가 이 나라의 주인이 될 것이다!'
그때였어요. 술판이 질펀하게 펼쳐지고 있는 마당 한가운데로 웬 소년이 소를 탄 채 성큼성큼 들어왔어요. 소년은 눈이 휘둥그래진 군사들을 아랑곳하지도 않고 대청마루를 향하여 카랑카랑하게 말했습니다.
"우리 스승께서 보고자 하시니 이여송 장군은 속히 나를 따라오시오!"
그 말과 함께 소년은 유유히 돌아서서 문 밖으로 나섰어요. 명나라 군사들 사이에 한바탕 소란이 일었지요. 대청마루에 있던 조정 신하들은 하도 기가 막혀 실실 헛웃음을 흘렸습니다.
"허허, 맹랑한 놈이로고. 이거 재미있는 놀잇감이 생겼군. 내가 한손으로 잡아서 구경거리로 만들어 주지."
그 말과 함께 이여송은 훌쩍 말에 올라 소년의 뒤를 쫓기 시작했어요. 수백명의 호위병이 그 뒤를 따랐지요.
이여송은 한달음에 소년을 잡으려고 채찍을 휘둘렀어요. 말은 비호처럼 달려나갔지요.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일까요? 분명히 소년이 탄 소가 천천히 걷고 있는데도 잡힐 듯 잡힐 듯 영 잡히지를 않는 것이었어요. 이제 따라잡았다 싶으면 또 몇 발자국 앞에 나가 있었지요.
그 이상한 경주는 한나절이나 계속됐어요. 수백리 길이 훌쩍 지나갔지요. 소년은 수려한 산 속으로 한참을 들어가 다 쓰러져 가는 초가집에 이르러서야 소를 멈췄어요. 명나라 군사들이 집을 에워쌌습니다.
소년은 방을 향하여 말했어요.
"스승님, 이여송 장군을 모셔 왔습니다."
그러자 방문은 열리지 않고 말소리만 들려왔어요.
"수고했다. 방으로 모시거라."
소년은 막 말에서 내려 숨을 헐떡이고 있는 이여송에게 짧게 말했어요.
"들어가시지요."
이여송은 자신도 모르는 힘에 이끌려 방으로 들어섰습니다. 세 사람이 들어앉으면 꽉 찰 것 같은 비좁은 방이었어요.
방안에는 한 노인이 앉아있다가 나직하고 위엄 있는 소리로 이여송을 맞이했습니다.
"누추한 곳까지 오시느라 수고하셨소. 거기 앉으시오."
노인은 밖에 있는 소년에게 다른 군사들을 모두 방으로 들이라고 말했어요. 그 좁은 방에 수백명의 군사를 들이다니, 어림도 없는 일이었지요. 그렇지만, 신기하게도 한 사람이 들어와 앉으면 그 옆에 새로 자리가 생겨났어요. 그렇게 해서 수백명 군사가 모두 방안에 들어와 앉았습니다.
"자, 그 동안 조선을 위해 싸우느라 수고했소이다. 한잔씩 드시구려."
노인은 옆에 놓여 있던 술병을 들어 이여송의 잔을 채웠습니다. 그리고 나서 술을 한 잔씩 돌리는데, 아무리 따라도 술은 줄지를 않았어요. 이여송과 군사들은 하도 신기해서 눈알만 이리저리 굴릴 뿐이었지요.
술이 다 돌고 나자 노인이 묵직하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이제 전쟁이 끝났으니, 딴마음일랑 먹지 말고 그대들 나라로 돌아가시오."
그 말과 함께 노인은 매서운 눈초리로 이여송을 쏘아보았습니다. 노인의 눈에서는 번개와도 같고 폭풍과도 같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어요. 이여송은 그만 뒤로 벌러덩 나자빠졌습니다.
이여송은 자기 마음을 훤히 꿰뚫는 이 노인한테 커다란 두려움을 느꼈어요. 자기도 모르게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소름이 쫙 끼치면서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어요.
'아이쿠. 조선을 넘보다가는 내가 먼저 죽겠구나.'
결국 이여송은 조선 땅을 차지하려던 계획을 버린 채 군사들을 이끌고서 중국으로 되돌아갔답니다. 노인이 아니었으면 또 한번 큰일이 터질 뻔했으니, 생각만 해도 아찔한 일이예요.
이여송을 꼼짝 못하게 한 그 노인이 누군지는 벌써 눈치챘겠지요? 그래요. 금강산에 숨어살고 있던 송구봉이었습니다.
그 뒤로 세상 사람 가운데 송구봉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만 그가 신선이 돼서 하늘로 올라갔다는 소문만이 널리 퍼져나가기 시작했지요.
오늘날까지도 시골의 노인들은 송구봉에 관한 전설을 전하면서 이렇게 말하곤 한답니다.
"그때 그 어른이 나라 일을 맡았으면 그까짓 왜놈들 단번에 쓸어버렸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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