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 ●굳이 복잡하고 난해한 한방의학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네 선조들은 쉽고 간단하면서도 부작용의 위험이 거의 없는 많은 경험적 의료방법을 후손에게 물려주었다. 예를 들어 식체(食滯)에 엿기름 생즙을 내어 두 홉을 마신다든지, 구체(오래된 滯症)에는 창출을 분말로 하여 수시로 복용한다든지, 지네독의 해독에 날밤[栗]을 먹는 것 따위는 잘 알려진 것이다. 또 충청도 일부지방에서는 토사곽란에 아궁이 흙 한 사발을 떠서 끓여 그 국물을 복용하기도 한다. 아궁이에서 온돌로 불이 넘어가는 구멍 주위의 진흙을 '복용간'이라 하는데, 이를 끓인 물을 토사곽란의 치료약으로 쓴다는 얘기다. 경북 봉화지역에 전래되어온 민간요법 중에는 토혈(吐血)에 황토수(黃土水) 한 잔을 먹는다는 내용이 있고, 경남·부산 지역에는 개에게 물렸을 때 살구씨를 붙이거나 혹은 복용한다는 방법이 전해온다. 개고기 먹고 체한 데 살구씨 말린 것 3~4개씩 깨뜨려 먹고, 돼지고기 체한 데 새우젓 국물 두세 숟갈씩 복용하며 혓바늘 섰을 때 대잎[竹葉]을 물에 끓여서 수시로 양치질한다는 민간요법도 있다. 요즘도 돼지고기 요리에 새우젓을 곁들여 먹는 것을 종종 보는데, 이는 돼지고기 먹고 체하지 않도록 미리 방지하려는 의도로 생각된다. 버섯 중독에 자작나무껍질[樺木皮]을 달여 먹고, 산후부증(産後浮症)에 늙은 호박을 고아 먹는 것은 부인들 사이에 널리 알려진 방약(方藥)이다. 또 대나무를 똥통에 박아 두었다가 매맞고 상하거나 크게 다쳤을 때 꺼내어 마디 사이에 고인 물을 먹는 것도 민간방의 하나다. 민간요법으로 가장 빈번하게 쓰이는 재료로는 소금된장간장술 등이고 그밖에 동물식물광물초목해산물 등 광범위한 물질들을 재료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소금의 경우 감기·두통·현기증·가슴앓이·위산부족·복통·위장병·폐병·감체·식체·서체(暑滯)·안질·두드러기·부스럼·옻오름·편도선·종기·편두통·머리비듬·파상풍·난산(難産)·치통·소독·소화제·토제·감기·해열·건위·이뇨·해독제 등으로 다양하게 이용되었다. 재래종 된장은 감에 체했을 때·찰과상·못에 찔린 곳·곤충이나 벌에 쏘였을 때·상처·두창·생인손·토사곽란·변비·치통·화상·체했을 때·출혈시 지혈제 등에 쓰였다. 간장의 경우 식체(食滯)·치통·화상·급성인후염·변비·염증·뜨거운 물에 데였을 때 각각 이용되었다. 술은 술의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대략 감기·광견독(狂犬毒)·충독(충毒)·송충이독·부스럼·이질·홍역·습진·심장마비 등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전해온다. ※약성 살리고 독성 제거하는 방법 고안 민간요법의 형태로 서민들 사이에 전해져 오는 값진 경험적 지혜가 생활양식의 변모와 서양의학적 사고방식의 지배적인 흐름에 밀려나 서서히 자취를 감추고 있음은 안타까운 일이다. 물론 사회구조의 변화와 생활양식의 변모로 새로운 유형의 질병들이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과거의 전통의학적 방법들이 모두 유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선 그것의 문헌적 보존은 필요한 것이고 더 나아가 전통의학적 의료방법이나 약물을 오늘의 현실에 맞도록 재창조하는 것이 보다 중요하다 하겠다. 필자는 유년시절부터 전통의학적 의료방법 및 약물들 가운데 몇 가지를 선택하여 현대인들의 질병치료에 유용하도록 개발하는 일에 일생을 바쳐왔다. 일생의 경험에서 필자는 대부분의 약재에는 약성과 독성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약성을 다치지 않고 독성을 제거하는 방법들을 고안해냈다. 예를 들어 부자(附子)가 보양제(補陽劑)로 명약이지만, 그것이 함유한 독성 때문에 살인물도 된다는 것을 알고 이의 완전 제독법을 발명해냈다. 물론 대부분의 한의사들도 부자의 독성을 중화시키 위해 법제를 하지만 완전 제독은 불가능한 것이 현실이다. 필자는 부자의 완전 제독을 위해 이를 토종 돼지에게 먹여 그 돼지의 내장과 고기 등을 약재로 사용한 결과 부자의 약성은 더욱 높아지고 독성은 전무해졌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혈액형이 대개 O형인 소양인(少陽人)의 경우 부자는 절대 금물로서 위험한 것이나 돼지에게 먹여 그 돼지를 약으로 쓰게 되면 어떤 체질보다 효과가 뛰어났던 것이다. 이것은 소양인에게 부자가 좋은 약이긴 하지만 소양인이 독성에 민감한 체질이기 때문에 부자의 독성보다 독성의 피해를 먼저 받아 오히려 해로운 것이다. 다른 약재들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산삼이나 인삼에도 독성이 함유되어 있으므로 이를 제독하는 방법에 밝아야만 약의 효능을 극대화할 수 있는 것이다. 어렸을 때 동네 노인들이 닭이나 개의 다리가 부러졌을 때 홍화(紅花)씨 몇알을 먹이면 이튿날 씻은 듯 치료되는 것을 자두 보았다. 그것을 볼 때 홍화씨는 부러진 뼈를 낫게 하는 묘약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노인들이 막상 집안 아이들의 뼈가 부러졌을 때는 허둥대면서 끌어안고 의생(醫生)을 찾아가 아이들을 오랫동안 고생시키는 모습을 보았다. 그 뒤 뼈 부러진 사람에게 홍화씨를 먹여 보니 신비할 정도로 빠른 기간내에 감쪽같이 낫는 것이었다. 필자는 근래에도 뼈가 부러진 사람은 물론 부서진 사람, 약한 사람에게 홍화씨를 먹도록 해본 결과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속히 낫는 것을 보곤 하였다. 그러나 그런 신비한 약물도 사람들은 보존하려 들지 않는다. 나는 팔십 평생 궁핍한 살림을 면치 못한 처지여서 이 땅의 신약(神藥)들을 보존할 능력이 없다. 다만 좋은 약이 된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 뿐인데, 이렇게 알려주면 그것을 많이 생산하여 이웃에 도움을 주려고 생각하는 이는 드물고 혼자 몽땅 가져다가 장롱에 감춰두고 썩혀 버리는 일이 많아 홍화씨도 이제 멸종 위기에 이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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