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학의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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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은 사람을 질병으로부터 구하고 건강을 유지시켜 편안한 삶을 누리도록 하는 학문이다. 그러나 질병을 일으키는 원인을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 치료 방법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의학을 크게 서양 의학(西洋醫學)과 한의학(韓醫學)으로 나누어 보 면, 서양 의학은 질병의 원인이 주로 외부적인 인자(因子) 즉, 세균 이나 바이러스 등이라고 보기 때문에 치료 방법도 이러한 것들을 제 거하는 데에 치중해 왔다.
이에 반하여 한의학에서는 질병의 발생 요 인을 주로 사람의 기력(氣力), 곧 정기(正氣)가 약하여 인체를 방어 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한의학에서는, 질병의 발생은 주로 저항 능력의 약화를 전제(前題) 로 하여 생각한다. 감기를 예로 들면, 감기를 일으키는 병균이 인체 에 침입하였더라도 그에 대한 저항력이 강하다면 병이 일어나지 않으 나, 반대로 몸이 약하여 저항력이 떨어지면 미약한 병균일지라도 쉽 게 인체에 침입하여 질병을 일으킨다고 본다.
또, 어느 한 질병의 발 생을 단순히 몸의 일부분에 국한된 이상(異常)으로 보지 않고, 몸 전 체의 생리적인 부조화(不調和)로 파악하고 있다.
이러한 시각은 한의학의 독특한 정체(整體) 관념에서 출발한 것이다. 인체의 조직이나 기관, 내장기는 각기 분리되어 따로 활동하는 것이 아니고, 생명 활동이라는 대전제 아래 기능적으로 조화를 이루며 활 동하고 있다.
따라서, 한의학에서의 치료 방법은 병균을 제거하는 데 초점을 맞추 지 않고 인체의 저항력을 기르는 데 맞추고 있으며, 질병을 치료할 때에도 이러한 상호 연관 관계를 충분히 고려하여 치료하는 것이 특 징이다.
만약 이를 지키지 않고 국부적인 이상만을 제거하려고 할 때 에는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데, 예를 들어 두통에 진통제를 먹고 열이 날 때 해열제를 먹으면, 통증이나 열은 제거될지 모르나 그 원인은 몸에 그대로 남아 있다가 언젠가는 다시 나타날 수 있다.
따라서, 보 다 올바른 치료 방법은 두통이나 열을 일으킨 원인을 찾아 그 생리적 인 부조화를 회복시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는 한의학은 고유 의학으로서 지키고 가 다듬어야 할 뿐만 아니라, 치료 효과가 우수하고 부작용이 적으므로 건강 증진을 도모하기 위해서라도 한의학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겠다.
한의학의 기원과 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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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의학의 기원
한의학의 기원은 멀리 중국의 옛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록에 복 희(伏羲), 신농(神農), 황제(黃帝), 요순(堯舜) 등의 전설적 인물이 한의학의 기원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한의학에서 최고(最古)의 서적이며 현재까지 한의학의 경전(經典)으 로 받들어지고 있는 。황제내경(黃帝內經)。은, 전설적 인물인 황제( 黃帝)의 이름을 빌려서 명칭을 붙였다. 그리고 신농은 일찍이 여러 가지 약의 효능을 밝혀 한약의 조상처럼 알려지고 있다.
그 약의 효 능은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이라는 책을 통하여 지금까지 전해 지고 있는 바, 이는 한약재에 대한 기본서로 전해지고 있다.
실제로 황제나 신농 같은 전설적인 인물이 이러한 책을 썼는가 하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많다. 그러나 의학이라는 것은 사람의 생존에 없 어서는 안 될 필요불가결한 것으로, 의학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이 옛 시대에 이미 있었다는 것을 이를 통해 알 수 있다.
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를 거치면서 한의학은 원시적인 틀을 벗고 본격적인 이론과 기술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앞의 。황제내경。과 。 신농본초경。도 이 시대에 완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에 후한(後漢)의 장중경(張仲景)은 。상한론(傷寒論)。을 저술하여 임상 의학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송(宋)나라 이전에는 주로 처방을 중심으로 의학의 대중화가 이루어 져 왔으나, 송나라 시대에 이르러 성리학(性理學)이 크게 발전하자 이의 영향을 받아 의학도 처방이나 침술과 같은 치료 기술뿐만 아니 라 이론적인 면에 더욱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성 과는 한의학의 이론적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고 음양오행설이 나타 나면서 한의학의 체계가 과학적으로 정립되었다.
금원 시대(金元時代)에는 한의학이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이 시기 에는 전쟁이 끊이지 않고 전염병이 크게 돌아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갔다. 따라서, 이것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끊임없이 행하여져, 이 시대에 유명한 의사 4명 곧, 금원사대가(金元四大家)가 출현하게 되 었다. 금원사대가는 유하간(劉河間), 장자화(張子和), 이동원(李東垣 ), 주단계(朱丹溪)를 말한다.
이렇게 이루어진 한의학 이론과 임상 방법은 명(明) 나라를 거쳐 청 (淸) 나라에 이르러 온병학(溫病學)이라는 새로운 장(章)을 열게 되 었다.
온병학은 현대의 열성전염병(熱性傳染病)을 포함한 급성병(急性病)을 가리킨다. 온병학은 과거의 의학 이론을 바탕으로 하여 당시 에 큰 문제가 되었던 전염병을 해결함으로써 한의학사상 중요한 일익 을 담당하게 되었다.
(2) 한의학의 전래
우리 나라가 의학 서적을 수입했다는 최초의 기록은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있으며, 고구려 평원왕 3년에 중국 오(吳)나라 사람 지총(知聰)이 。내외전(內外典)。, 。약서(藥書)。, 。명당도(明堂圖)。 등 164권을 가지고 고구려를 거쳐 일본에 귀화하였다고 한다.
이때 우리 나라는 중국의 의학을 최초로 받아들였다고 할 수 있으며, 여기에서 。내외전。은 。황제내경。, 。외경(外經)。 등의 의서를 말하고, 。약서。는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 。명의별록(名醫別錄)。 등이며, 。명당도。는 침과 뜸에 관한 서적이다.
이보다 약간 후에 백제는 남북조 시대(南北朝時代)의 여러 나라로부 터 의서를 수입하였는데, 백제 시대에 만들어진 。백제신집방(百濟新集方)。에 이들 의서의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전래된 의학과 의서들은 삼국 시대를 거쳐 고려 시대에 이르 러 민족적인 자각으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고려 시대 이전의 단순한 수입 의학 일변도에서 탈피하여 우리 나라 사람에 맞는 새로 운 의학을 정립하고자 노력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이론적인 면에 서는 이렇다 할 발전을 이루지 못하였지만, 약재와 처방에서는 상당 한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는 고려 시대 의학을 정리 종합하였을 뿐만 아 니라, 다시 새로운 의학 이론을 정립하여 중국에 견줄 만한 큰 성과 를 거두었으니,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과 。동의보감(東醫寶鑑) 。이 그것이다.
。향약집성방。은 고려 시대에 편찬된 우리 나라 처 방 의서들을 종합 정리하여 새롭게 출판한 것으로, 우리 약재를 일반 대중에게 널리 알리기 위한 노력의 결과였으며, 。동의보감。은 허준 (許浚)이 선조의 명을 받들어 편찬한 의서이다.
그 중 。동의보감。은 중국에서 가장 발달된 의학이라 할 수 있는 금원사대가의 이론을 받아들이고 아울러 역대 의서들을 총괄하여 독 특한 방식으로 편집하였는데, 이렇게 뛰어나고 보기에 편리한 서적은 일찍이 없었으며, 다시 중국으로 역수출(逆輸出)되기도 하였다.
。동 의보감。 이전의 의학이 중국 의학을 그대로 답습하였거나 중국 의학 이론에 국산 약재나 우리 기술을 사용해 온 것에 비하여, 。동의보감 。 이후의 의학은 명실 상부한 우리 의학, 즉 한의학(韓醫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자부심은 책 제목의 ‘동의(東醫)’라는 뜻에서 도 잘 알 수 있다. 조선은 이미 세종 시대에 한국 의학의 자주적 기 초를 마련할 정도로 크게 발전하였고, 특히 향약의 연구와 보급은 한 국인의 질병 퇴치에 획기적 업적을 이룩하였다.
이러한 학문적 토대 위에 허준이 。동의보감。을 편찬함으로써, 한국 의학은 그 독자적 지위를 가질 수 있게 되었고, 책 제목의“동의”(東醫)는 우리 의학 이 중국 의학과 대등한 것임을 과시한 것이었다.
조선조 말기에 이르러 우리 의학은 다시 한 번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니, 이제마(李濟馬)의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의 출현이다. 이제마는 기존의 것과 다른 체질 이론(體質理論)을 도입하여, 각 체 질에 따른 독특한 병리를 설명하고 치료 방법을 제시하였는데, 이를 사상체질 의학론(四象體質醫學論)이라 부른다.
이러한 자주적 정신을 이어받아 한의학(漢醫學)을 우리 고유의 한의 학(韓醫學)으로 개칭하기에 이르렀다.
한의학은 동양 의학·동의학·민족 의학으로 불리기도 한다. 한의학 의 한자 표기는 ‘韓醫學’인데, 이는 단순히 한국의 의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동양 의학 중에서도 한민족의 고유한 의학이라는 자주성 을 강조해서 말하는 것이다. 한의학을 영자 표기했을 때‘Korean me- dicine’이 아니라 ‘Oriental medicine’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 러한 의미이다.
우리 나라는 예로부터 중국과의 교류가 빈번하여 한의학에 중국의 의학이 다분히 내포되어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중국과 우 리 나라는 기후와 토양이 다르고, 민족과 산물이 다른 까닭에 우리 나라는 나름대로의 독창성을 발휘하여 우리 형편에 맞는 고유의 의학 을 개발해 왔다.
우리의 조상들은 100여 년 전까지 바로 민족 의학으로 병을 고치고 보다 나은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숱한 전설과 역사적 사실 속에서 발견되는 우리 민족의 의학적 지식은 단순한 민간 요법에 그친 경우 가 있는가 하면, 민족사에 빛나는 금자탑을 쌓은 큰 인물들의 업적으 로 발전한 경우도 많다.
그러던 것이 서구 문물의 전래와 일제의 민족 정신 말살 정책에 의 해 전통적인 것들이 다분히 왜곡·비하되고, 서구적인 것이 대접받는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서양 의학의 한계와 부작용이 나타나면서 사 람들의 관심이 자연히 ‘우리 것’과 ‘보다 자연과 가까운 것’을 추구하게 되면서, 한의학이 다시 각광을 받는 자리에 서게 되었다.
일찍이 세종 대왕께서는 우리 백성이 질병에 시달릴 때, 구하기 어 려운 중국산 약재보다는 우리 풍토에서 생산되는 약재 즉 향약(鄕藥) 을 사용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판단에서 제세구민(濟世救民)의 큰 뜻 아래 。향약채취월령。, 。향약집성방。 등을 편찬케 한 바 있다.
신토불이(身土不二)라는 말도 있듯이,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병을 치료하는데는 이 땅에서 나는 약재가 가장 효과적이다. 옛 말에 ‘병 이 있는 곳에 약이 있다.’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따라서, 향약을 계승·발전시킨다는 것은 단순히 우리 나라의 약재 재배 농가들을 위한 일만이 아니라, 민족사의 재조명 내지는 전통의 재발견, 나아가 새로운 한국적 약물학의 발달을 위해서도 반드시 이 루어져야 할 일이다.
한의학과 전통 의학, 민간 요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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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은 원시 시대에 시작하여 오랜 역사 과정을 거치는 동안에, 인간의 생명 보호, 질병 치료, 건강 증진|즉 예방·치료·양생(養生) 을 실천하여 왔다.
이러는 가운데 한의학은 자연계 사물의 성질과 변 화의 법칙에 대한 인식을 결합하여 의철학(醫哲學)을 형성했으며, 이 의철학을 바탕으로 이론적인 발전과 임상 경험을 종합하여 오늘의 한 의학을 이루었다.
그러나 한의학은 이렇게 종합적으로 경험한 것을 특유의 의학적 원 리로 분석·평가하여 이를 학리적 의학으로 창조하여, 예방·치료 및 양생 체계를 갖춘 정밀한 실천 의학으로 계승·발전되어 왔다.
그리 고 오늘날에는 한의학이 의학 이론, 의학 양태, 의학 기술의 존속 및 발전에 있어서 그 몫을 훌륭하게 담당하고 있으며, 장차 내일의 인류 건강을 위해서도 그 역할을 다하게 될 것이다.
한의학은 값진 전통 의학이다. 전통 의학이란 ‘선대(先代)로부터 이어져 오는 경험의 축적이 학리적 실천 의학으로 계승·발전되어 현 재의 의학 이론·의학 양태·의학 기술의 존속 및 발전에 대해 적극 적 의의를 갖는 의학’이라고 정의할 수 있으며, 옛 스승이 물려준 학문, 사상, 기술을 이어받아 후손들이 새로운 이론을 창출하고 발전 시켜 온 것이다.
이 중에서 ‘선대로부터 이어져 오는 경험의 축적’ 까지의 단계를 민간요법 단계라 하고, ‘경험의 축적이 학리적 실천 의학으로 계승 ’ 되기까지의 단계를 원시 의학 단계라 하며, ‘학리적 의학으로 계 승·발전되어 현재의 의학의 존속 및 발전에 적극적 의의를 갖는 의 학’의 단계를 미래 지향적인 전통 의학의 단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한의학은 단순히 민간 요법을 한데 모아 놓은 것이거나 초 보적 원시 의학이 아닌, 우리의 전통 의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민간 요법은 어떻게 이루어진 것일까?
경험의 축적은 원시적 사고, 본능적 의료 행위 및 실천 경험에서 비 롯된 것이다. 원시적 사고는 주술적 사고와 함께 자연계 사물의 성질 이나 모양이 그와 유사한 어떤 작용을 할 것이라는 유사율(類似律 : Law of similarity)이 어우러져서 유사주술(類似呪術:Homoeopathic m agic)을 형성했다.
또, 동물이 행하는 본능적 의료 행위처럼 인간도 자기 보존 본능에 의해 의료 행위를 되풀이하는 동안 지식을 쌓고 그 방법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먹을 것을 찾아다니는 과정에서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을 가늠할 줄도 알게 되었고, 그 중에서 어떤 것은 질병의 고통을 덜어준다는 것도 알게 됨으로써 실천 경험 을 쌓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민간 요법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민간 요법과 한의학은 질병 치료를 위한 약물투여면에서 어떻게 구별되는가? 민간 요법에서는 환자가 호소하는 단순한 증상만 을 보고 직관적으로 효과적이라고 경험·실천되어 온 단일 약물을 그 저 투약하고 효과가 있기를 기대하는 것이 고작이다.
그러나 한의학에서는 민간 요법의 약물과 달리 한의학적 원리에 입 각한 일정한 법칙에 따라 몇 종류의 약을 각각 규정에 맞는 분량대로 엄격하게 배합하여 하나의 처방을 구성하여 투여한다. 즉, 한의학에 서는 약 하나 하나의 성질과 약효를 근본으로 하되, 이들이 한데 어 우러져 더욱 큰 효과를 낼 수 있는 상승 효과를 한의학적 원리 아래 충분히 고려하여 처방하는 것이다.
따라서, 한의학의 약물 요법은 민 간 요법을 한의학의 원리 아래, 더욱 체계화시킨 것이라고 해도 과언 이 아니다.
민족과 함께 해 온 전통 민간 요법은 그 내용이 그 역사만큼이나 방 대하고 풍부하다. 그 중 유효한 요법들만 추려서 。동의보감。을 비 록한 여러 의서에서 기재했던 것처럼 앞으로도 민간 요법을 발굴하고 과학적·이론적으로 체계화하기 위한 기초 의학 연구 및 임상 의학 연구를 진행하여, 질병의 치료 예방에 널리 이용해야 할 것이다.
인체와 한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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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활동을 영위하는 사람의 몸은 개인에 따라 다소의 차이는 있을 지언정 모두가 인류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다만, 인체의 생리기전 (生理機轉)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동일한 현상이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한의학은 매우 독특하고도 ‘자연적’인 관점으로 인체의 생리 현상을 이해하고 있다.
한의학적으로는 인체를 작은 우주[小宇宙]라고 한다. 지구의 자연 계와 천체를 큰 우주[大宇宙]라고 하는 데 비하여, 인체를 소우주 라고 한 것은 인체가 대자연계 속에 파묻혀 살아가는 하나의 또 다른 우주인 동시에, 대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해석하는 방법으로 인체의 현상을 해석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서양 의학과 비교 되는 한의학의 가장 크고 중요한 특징이다.
인체는 어항 속의 물고기와 같아서, 그 생존이 어항 속의 물의 온도, 혼탁한 정도, 먹이의 다소, 광선의 여부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데, 만일 물고기를 어항에서 꺼내 놓고 관찰한다면 그게 올바른 관찰 조 건이 되겠는가?
인체는 대우주 속에서 사는 소우주(小宇宙)이기 때문에 의학은 대우 주가 소우주에 미치는 직·간접적인 영향에 항상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시 말해서, 한의학에서는 반드시 인체 그 자체 뿐만 아니라 그 인체가 처해 있는 상황과 여건을 중요시한다.
자연계에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어서 생장수장(生長收藏)의 변 화 과정을 반복하듯이, 하나의 인간 개체도 유·소아기의 생(生), 청 ·장년기의 장(長), 노쇠기의 수(收), 임종에 있어서의 장(藏)이 있 고, 이것이 반복되는 것은 대(代)를 이어 자손이 번창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또한, 하루 중에서도 해가 뜨는 것과 함께 인체의 양기(陽氣)가 일 어나기 시작하여,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때 양기가 가장 활발해지고, 해가 지고 저녁이 되면서 양기가 쇠퇴해지다가, 밤이 되고 기온이 내 려가면 인체도 그에 따라 휴식을 취하고 잠을 자게 되는 것이다.
한의학에서는 이러한 관계를 매우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인체의 생리와 병리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설정하고 있다.
두 가지 예를 들어본다. 몸의 열(熱)은 대개 오후 2시부터 4시 사이 에 가장 높이 올라간다. 결핵이 있을 때, 학질에 걸렸을 때 이런 현 상을 종종 볼 수 있다.
왜냐 하면, 하루 중에 오후 2∼3시가 기온이 가장 높은 데 이는 양(陽)이 극성(極盛)하다는 것과 같고, 인체의 양 기(陽氣)도 오후 2∼3시에 가장 왕성하기 때문에 최고로 올라간다. 이것을 달리 생각하면 인체 내에 잠복해 있는 병원(病原)은 이때에 활동이 가장 활발할 것이므로, 체내의 양기도 이에 맞서기 위해서적극적인 활약을 하는 까닭에 열이 상승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하루 중에 기온이 제일 낮은 때는 해가 뜨기 직전이다. 이는 음(陰)이 극성하다는 것과 같고, 이 때 음기가 성한 사람은 차가운 설사를 하는 일이 많다.
음기가 성하면 양기는 상대적으로 쇠약해지 므로 혈액 순환이 활발하지 못하고, 체온이 낮은데다가 장(腸)에서 수분을 흡수하지 못한 채 급히 외부로 배설하게 되므로, 이것이 곧 설사다. 따라서, 이 경우에 설사를 멈추게 하는 약을 투여하는 것은 별로 도움이 안된다.
치료 시에는 전자의 경우, 쇠약해진 음기를 북돋우고 성해진 양기를 식혀주는 방법을 써야 하고, 후자의 경우 성해진 음기를 가라앉히고 약해진 양기를 북돋아주는 방법을 써야 한다. 한의학의 치료 방법이 근본적인 치료라고 함은, 바로 이러한 대우주와 소우주의 상관 관계 에 따라 인체의 병리 현상을 파악하여 그에 맞는 치료를 하기 때문이 다.
한편, 인체의 구조를 통해서도 자연계의 섭생 원리를 이해할 수 있 다.
영구치(永久齒)는 모두 32개가 있는데, 그 중 앞니가 8개, 송곳니가 4개, 어금니가 20개이다. 왜 하필이면 이렇게 되었을까?앞니는 채소 나 과일을 끊어서 먹는 데 필요하고, 송곳니는 육류를 찢어 먹는 데 필요하며, 어금니는 곡식을 갈아 먹는 데 필요하다. 다시 말하면, 사 람이 먹는 음식의 비율이 치아 갯수의 비율과 같이 채소류 8 : 육류 4 : 곡식류 20, 즉 2 : 1 : 5 로 되어 있으며 이렇게 골고루 먹어야 균형 잡힌 식사가 된다.
지구상의 수많은 동물 중에서 사람만이 완벽한 직립(直立) 생활을 한다. 그래서 위에 있는 머리와 가슴은 양(陽)의 속성을 띠고 아래에 있는 배와 다리는 음(陰)의 속성을 띠게 되는데, 이것은 자연계에서 의 물과 불의 상호 관계를 통해서 보면, 인체의 위, 아래가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야 건강할 수 있는가를 알 수가 있다.
물은 음성(陰性)이라서 밑으로만 내려가는 하강성(下降性)이 있고, 불은 양성(陽性)이라서 위로 올라가는 상승성(上昇性)이 있다. 그래 서 물의 흐름이 있고 불꽃이 타오르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물은 밑에 고여 있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불[열기]에 의해 수증기로 변 해 위로 올라가고, 불[열기]은 위에 떠 있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 내려와 이른바 대류 현상을 일으킨다. 만일 이러한 대류 현상 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지구에는 생물이 살지 못할 것이다.
인체도 이와 마찬가지로 하체 쪽에 있는 음기가 상체 쪽에 있는 양 기와 교류를 해야만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앞에서 예를 든 몸의 열 과 해뜨기 전의 설사도 결국은 인체 위·아래의 음·양의 교류가 제 대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계절과 인체 및 생활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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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에서는 환경과의 조화와 평형을 건강의 기초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한의학에서 말하는 이상적인 의사는 모든 우주적 형태가 어 떻게 작용하는가를 아는 현인(賢人)이며, 그는 환자를 개별적으로 치 료하고, 특정 질병으로 분류하지 않으며, 개인의 정신과 육체의 총체 적 상태와 자연 및 사회 환경과의 관계를 가능한 대로 기록한다.
약간 좁은 의미로 한의학에서의 전일성(全一性)은 인체의 각 구성 성분이 모두 상호 관련적이고 상호 의존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개체는 물리적·사회적인 환경과 계속적인 상호 작용 을 하면서 큰 조직체에 통합되는 한 부분이며, 환경에 끊임없이 영향 을 받고 또한 환경에 적응하여 이것을 수정해 가는 존재라고 생각한 다.
천관총제질의(天官총帝疾醫)에는, “봄에는 머리가 무거운 것 같은 통증이 오기 쉽고, 여름에는 중기(重氣: 갑자기 졸도하는 것)가, 가 을에는 학질이, 겨울에는 해수 천식이 항상 잘 발생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기술(記述)로부터 질병의 계절성이 분명히 인식되고 있 음을 알 수 있다.
건강과 질병에 대한 한의학적 접근은 서양 의학과는 다르다. 일반적 으로 인체에 일률적으로 접근하는 서양 의학에 비해 한의학적 접근은 주관적 판단에 가치를 부여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인체의 건강이란 개념이 상대적이고 생태학적 특색을 갖고 있다.
건강이란 상호 의존적인 인간과 자연, 사회와의 관계를 포함하는 다 차원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인체는 기계가 아니고 살아 있 는 유기체이며, 전일적이고 생태적 개념이며, 모든 현상은 근본적으 로 상호 의존적이고 상호 관련적이다. 따라서, 자연을 기본 구조로 생각하는 살아 있는 유기체에 대한 시스템적 견해로 이해할 수 있다.
지난 수 세기 동안 서양 세계를 지배해 온 ‘자연은 인간의 정복 대 상’이라는 사상이 최근 변하고 있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상호 의 존적이며, 서로에게 절대 필요한 관계임을 인식했다는 이야기이다. 인간은 환경의 영향 속에서 살며, 인간 또한 환경에 많은 영향을 미 친다.
결국, 인간의 건강과 질병은 환경과의 관련 속에 있으며, 따라서 인 간의 건강과 질병 문제를
다루는 데 환경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다. 이런 전체론적인 접근은 이미 수천년 전부터 인식되어 온 한의학의 기본 철학이며, 실제로 이 것이 한의학의 중요한 사상이기도 하다.
한의학과 서양 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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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의학은 해부학적 지식을 기초로 하여 인체의 기능이나 질병을 설명하기 때문에, 질병이란 것은 인체의 어떤 부위에 변화가 생겨서 나타나는 것으로 보고 치료도 그 부위에 대해 행한다. 따라서, 병 이 름에는 그 해부학적 부위의 이름이 붙게 된다.
그리고 치료할 때에는 그 병 이름에 따라 병이 있는 내장이나 기관 에 유효한 약을 처방한다. 예를 들면, 질병이란 것은 위장이나 심장 등 몸의 어느 한 부분이 나빠진 것이라고 생각하고, 약도 그 나빠진 부위 하나하나에 작용하는 것을 써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반면, 한의학에서는 인체를 하나의 통일체로 인식하고, 각각의 장기 와 조직들이 긴밀히 연결되어 움직이는 것으로 보고, 아울러 질병이 란 인체가 어떠한 원인에 의하여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며, 그 변화는 내적·외적인 여러 가지 원인에 대한 인체의 반응 상태이므로, 여러 가지 증상이 나타나더라도 그 하나하나의 증상이 독립된 것이 아니고, 모두 긴밀한 연계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따라서, 형태상의 변화나 검사 수치상의 변화가 없어도 자각 증상만으로 충분히 질병의 증후가 나타난다고 보는 것이다.
한의학에서는 이른바 음양허실(陰陽虛實)을 인체의 가장 기본적 생 명 현상으로 보고, 음양허실을 가려내는 것을 근본으로 한다. 병적 반응에 약해진 상태를 음증(陰證)으로, 그 반대의 경우를 양증(陽證) 으로 본다. 그러므로 기침이 난다고 해도 같은 약을 주지 않으며, 음 양허실의 차이에 따라 처방이 달라진다.
한의학에서 사용하는 약물에는 동물, 식물, 광물 등 여러 가지가 있 으나, 잎, 뿌리, 나무 껍질, 나무 열매 등 식물이 많이 쓰여진다. 이 들은 원래의 재료 그대로 사용되는 것도 있으나, 대부분 약의 효능을 올리거나 독을 제거하기 위하여 술이나 소금물 등에 담그거나 볶기도 하고 일부 가공하는 법제(法製)에 따라 다양하게 이용한다.
서양 의학에서 생각하는 유효 성분과 한의학에서 생각하는 유효 성 분은 서로 다른 개념을 가지고 있다. 한약은 자연 형태 그대로 쓴다 는 것이 장점이며 특징이다. 독성이 있는 약물도 적절한 배합에 의해 독성이 없어지고, 유효 성분의 작용이 강화되는 등 여러 가지 흥미로 운 현상이 나타난다.
양약의 안전성은 확실히 보장하기 어려운 경우 도 있다. 그렇지만, 한약의 안정성은 수천 수만의 환자에게 투여해 본 경험에 근거하여 얻어진 것이므로 부작용이 거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