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향산 生佛의 金剛經 강론
그런데 이 불가(佛家)에 하동산(河東山)이라고 있는데 대선사(大禪師)로 대우받아요.
그 양반이 묘향산에 생불(生佛)이 있다. 그래 가지고 ≪금강경≫(金剛經)을 좀 배우고 싶어서
≪금강경≫에 각(覺)한 자가 어디 있을까? 그러지 않으면 답답해서 통(通)한 자라도 있으면 ≪금강경≫의
진리는 좀 얻어낼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애를 쓰고 묘향산 큰 절의 승려들 데리고 나를 찾아냈어요.
그런데 그게 마침 설령암에서 만났다.
그래 만나서 반가워하는데, 나는 오는 줄 알고 있지만 반갑게 대하는데 이야기를 하다가, 온 이유는
“≪금강경≫에 대해서 좀 물어 볼 일이 있어 왔습니다.” “알겠소. 지금 선사로 대우받는 이가 점잖은 처지에
애들한테 와 물어 보겠다는 생각이 불치하문(不恥下問)이라고 공자도 한 말씀이고, 옛날 양반도 한 말씀인데.
그건 고맙소. 그렇지만 동산당은 절대 ≪금강경≫에서 득(得)이 올 걸 생각 마시오. 그 경 속에는 부처가 되는 소린 없어요. 득이 없을 테니 그 원리는 내가 가르치지요.”
그래서 가르치다가 범소유상(凡所有相)이 개시허망(皆是虛妄)도 거 세밀하게 가르치
오. 귀신세계는 이렇느니라.
그건 보이지 않는 세계다. 보이지 않는 귀신세계의 고통은 보이는 이 육신세계의
고통하고 다르다. 그건 가장 비참하다.
그런 비참한 고통세계의 이야기를 쑥 빼고, 보이는 고통세계의 이야기를 쓰니 그게
너무 허망한 소리에 불과하다.
‘범소유상이 개시허망’ 그건 너무 답답한 소리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유상무상(有相無相)이 개시허망(皆是虛妄)이라고 해라.
무상세계에 들어가면 유상세계보다 더 허망하니라.
하루살이 죽은 영(靈)은 순식간에 전류(電流)에 녹아 없어진다.
전류에 녹아 없어지는 하루살이의 영은 불에 들어가 타 죽는 하루살이의 고통보다
더하다.
만약에 동산당이 가서 전류에서 어떤 고통을 겪는 걸 알고 있느냐? 그런데 어떻게
무상세계의 고통을 말하지 않고 유상세계의 고통을 말하면서 경전에서 득이 오겠
느냐? 그건 득이 없다.
또 함허당(涵虛堂)같은 학자가 이게 무슨 소리냐? 이런 철없는 말을 불경에다 어떻
게 쓰느냐? 부처님은 대각자(大覺者)야.
이 ≪금강경≫은 잘못된 거라도 중간에 선사(禪師)들이 한 거지, 부처님이 이런 잘못
을 세상에 전한 건 아니다. 여기에 뭐라고 했느냐? 사해파정용온면(四海波靜龍穩眠)
이요, 사해의 파도가 고요하니까 용이 편케 잠들 수 있고.
장천구만학비고(長天九萬鶴飛高)라, 구만장천엔 학이 마음대로 높이 날아갈 수 있어.
그러면 유가(儒家)의 선비가 구만리장천이지, 우주의 비밀을 아는 석가모니가
구만리장천이라는 말을 들으면 얼마나 웃겠느냐?
내가 이렇게 한심하게 웃는데, “이 글이 석가모니 뜻을 밝혔다고 보느냐? 그러면 동산당은 내 말을 믿어야겠
소.”하니까, “선생님 말씀이 전부 진리인데 어떻게 안 믿어요.” “그래 알겠소. 일시(一時)에 불(佛)은 재사위국
(在舍衛國)이라 했는데, 사위국이 있소? 그 당시에 숲속에서 돼지나 잡아다 먹고 나눠 먹는데 여기에 사위국이
어떻게 통하느냐? 정반왕(淨飯王)이라는 건 후세에 존대할 수 있으나 그 당시에 실제로 정반왕이냐? 가비라
산성은 있을 수 있으나 사위국도 있겠느냐? 그러니 그렇게만 서로, 동산당도 그건 알 거이니 나도 그렇다는
말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