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만이 먹고 살았다는 백복신은 일명 神木이라 하며 곧 心木이라고 부른다. 신선이 먹는 음식이니 우리도 먹으면 신선이 될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면 약을 잘먹어 신선이 된다는 얘기인가?
이것은 하나의 넌센스이다. 옛사람들의 말은 항상 깊은 뜻을 지니고 있다.
백복신이란 소나무의 뿌리에 나타나는 일종의 덩어리를 말하는데, 흔히 '뿌리혹 박테리아'라고 불리우고 있다.
여하튼 기이한 물건이 생겨나서 인간에게 이익을 주는 약이니 동의보감의 약성을 일단 참고해 보자. '茯神補心善鎭驚 恍惚健忘怒喪情'이라 하여 백복신은 심장을 보하며 놀래고 가슴 두근거리는 병이나, 황홀해지거나, 건망증이나 분노의 감정을 잘 진정시킨다는 말이다.
복신이라는 물건이 신기하다면 복신을 내어놓는 소나무란 놈이 더욱 신기하지 않은가? 소나무란 놈의 신기한 덕성이란 이루말할 수가 없다. 옛말에 '소나무 푸르른 것은 백설이 뒤덮힌 겨울에야 드러나고, 대장부의 남몰래 닦은 도는 난세에 더욱 빛이 난다'는 말이 있다. 여름철에 다 푸르른 것은 그 우열을 가릴 수가 없다. 오히려 소나무보다 더욱 그 빛깔을 아름답게 뽐내는 나무들이 많다.
묵묵히 스스로의 분수대로 지켜나가는 소나무지만, 모든 나무들이 다 죽은 혹독한 겨울철에도 그의 생명을 찬란히 구가하지 않는가?
이 소나무의 덕성은 사시에 모두 미친다. 그러므로 춘하추동의 四氣가 모두 엉겨있다. 봄의 덕은 만물을 골고루 생산시켜 싹을 틔워주듯이 私心이 없으니 부처님의 사무량심 중 慈心에 해당하며, 여름의 덕은 모두 개화시켜 자라나게 하고 만물과 더불어 그 축복을 나누니 喜心에 해당한다. 더불어 남의 기쁨을 즐거워함이니 곧 희심이요, 만물을 공평하게 생성시키니 자애로운 마음이 아니겠는가?
가을의 덕은 결실을 맺어 수확을 하여 거두니 이는 겸허하게 자신의 소유를 내던지고 기꺼이 죽음으로써 후손의 번영을 기대하는 捨心이니 죽되 사는 것이다. 겨울의 덕은 감추고 보호하고 저장하는 마음이니, 고통받는 자를 쉬게 하고 병든 자를 보호하여 힘을 저축하게 도우는 悲心이다. 남의 고통을 자기의 고통같이 하여 그 고통을 제거할 것을 서원하는 보살의 서원이 곧 비심이 아니겠는가?
소나무는 이와 같이 사시의 덕을 모두 지니고서도 자랑하지 아니하면서, 그 뿌리에는 신선의 덕을 쌓아놓아 신선을 도운다. 복신의 맛은 아무 맛이 없는 유별난 특징인데, 실로 무미의 맛을 터득한 나무이므로 신목이라 불리우는 것이다.
마음은 비워야만 천지를 포용할 수 있고, 맛은 맛이 없어야만 만가지 맛을 느낄 수 있다. 허공은 비어서 천지 일월과 별들의 운행을 담고 있듯이, 맛이 없는 맛은 맛중의 맛이다.
그러나 복신이 신기하다지만 그 신기함의 성품을 판단한 인간의 지혜는 더욱 신기하지 않는가? 잘 놀래지 않고 두근거리지 않고, 쉽게 도취하여 황홀해지지 않고 잘 잊지 않고, 분노하지 않는 사람만이 이러한 지혜를 가질 수 있는데 과연 쉬운 일일까? 놀라지 않으려면 안정이 되어 있어야 하는데, 안정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항상 복신이라는 약의 신세만 질 수는 없지 않는가?
쉽게 황홀해 하는 약점은 도취이다. 도취감은 자신을 쉽게 내던지는 무력함이다. 두려움 없는 사람만이 도취하지 않는다. 술이나 마약이 도취를 불러일으켜서 잠깐의 근심이나 공포를 잊게 하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못된다. 분노는 욕심을 근거로 한다. 그러니 이런 등등의 문제를 과연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보다 근원적인 문제의식을 가지고 깊숙이 파고 들어가지 않으면, 결국 약의 신세를 질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