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성'(으)로 총 543 개의 검색결과가 있습니다

교류의 장 총 74개의 검색결과가 있습니다.

  • 지구의 시간차별 위성사진
    지구의 시간차별 위성사진 아래의 사진은 정지 위성에서 2003/11/25 매시간 정각에 캡쳐한 사진입니다. Time:07.00 Time:08.00 Time:09.00 Time:10.00 Time:12.00 Time:13.03 Time:14.00 Time:15.02 Time:16.00 Time:17.00 Time:18.00 Photo By Ensar Yanar --3D Imagery mystical Planet XAPO-6 silence calm2 ghostarena2 From: guillermo (Jan 29, 2003 04:45 MST) fabulosa Blissphemy From: ilibox (Oct 16, 2002 15:25 MST) Calm Death of Vampires From: driveforward (Jul 31, 2003 05:25 MST) Behind the Hills From: Steve Newport(Oct 12, 2002 08:34 MST) My Rayz From: sophie (Oct 19, 2002 05:26 MST) norsun mavish cudi From: Steve Newport(Oct 12, 2002 08:36 MST) Phantom Planet Sunburst Gezegen Canyonz Something Under Utah disappointment From: z3n(Feb 09, 2003 23:05 MST) disorder
    교류의장정다운 게시판
  • 야광주의 생성과정 (1)
    소나무진액 진짜는 최종 야광주로 화한다. 송목은 지중의 섬유수를 흡수하여, 나이테로 화하는 영지선분자인 소나무의 진액이 ,   송목에 상처가 나면 송액인 송기가 외부로 흐른다. 그러면 바람속에 있는 영지선분자가 송목에 에서 흐르는 송기에 접하면 송지로 화하고 이 송지에 태양에서 통하는 영지선분자가 방사선으로 접하고면 흑적색으로 변하는 고체가 되고 이 고체는 지중에서 수만년 후에 호박으로 화하고 이 호박이 수십억년을 경과하면 야광주로 변화한다...
    교류의장정다운 게시판
  • 두부의 독성
    두부의 독성을 강조하셨는데 그 간수에 공해독이 스며있다 면  간수는 그져 소금으로 만들텐데, 우리는 소금을 늘 먹는바이고 또한 짜게먹는거이  좋다하시는데.. 대부분 사람들이 즐기는 두부의 독성이 과연 어느정도인지. 소금과 간수와의 관계를 알고싶습니다. 땅콩은 비소독이 있어  그것도 많이 먹으면 않좋다하셨지요. 그것도 언느 정도를 의미하는지.. 아시는 분의 답변을 고대합니다.
    교류의장정다운 게시판
  • 권성탁님(변향부자) 탕약
    약재의 양이 상당하죠? 많은 행복한 노력으로 부디 좋은 결과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
    교류의장인산학 체험기
  • 친구를 4자성어로???
    흔히들 친구를 벗이라말한다 이를 벗 붕(朋)이라한다, 친구사이 에는 당연히 믿음이 있어야한다 이를 믿을신 (信)이라한다, 친구는 빛이다 고로 내마음을 밝게비추어주는 빛 색(色)이라한다, 친구들 끼리는 자신들만의 알수없는 기운이 감돌고있다 이를 기(氣)라한다. 따라서 친구를 4자성어로 하면....? (朋信色氣)다, 도해 닷컴 2004년~~화이팅~~"
    교류의장정다운 게시판
  • 죽염은 산성인가 알카리성인가요?
    어느 정도의 Ph 인지 알고 싶습니다. 물을 희석하는 양에 따른 페하가 달라질 것으로 생각됩니다. 자료가 있으신 분은 답변 부탁합니다.
    교류의장정다운 게시판
  • 탄생나무로 알아보는 당신의 성격 !!
    나는 맞는거 같은디...  아님 말구 ...???
    교류의장정다운 게시판
  • -음성공양-
    교류의장정다운 게시판
  • ♡ 사랑은 상대를 성장시키는 에너지 ♡ (펌)
    여러분이 창조주로부터 가장 처음의 근원으로 분화되었을 때에, 창조주는 각각의 근원들에게 스스로 확실히 성장해 갈 수 있는 모든 에너지의 요소를 넣어 두었습니다. 여러분이 창조주에 의해 하나의 근원으로 만들어져 우주에 내던져졌을 때, 여러분은 이미 벌써 스스로 활동할 수 있도록 만들어지고 있었습니다. 우주에 한 근원이 내던져졌을 때, 그 근원 자신은 처음에는 자신은 무엇인가를 전혀 깨닫지 못한 상태에 있게 됩니다. 그 근원은 우주 안에서 영원이라는 시간을 감돌고 있는 동안에, 점점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무엇인가 행동을 일으키고 싶다고 하는 기분이 그곳에 솟아오릅니다. 어떤 근원은 오로지 빛을 추구하며 앞으로 나아가려고 생각합니다. 어떤 근원은 자신의 동료를 생산하고자 하는 기분이 들게 됩니다. 어떤 근원은 자신과 닮은 것을 찾는 여행을 떠나려고 생각합니다. 여러가지 생각을 가진 근원이 무수하게 우주 공간에 감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근원은 행동을 시작합니다. 행동을 시작하는 동안에, 점차 자신이라는 존재의 특질을 깨닫게 됩니다. 다른 근원과 자신은 전혀 다른 성질을 가지며, 움직이는 방법도 다르고, 빛도 다르며, 모든 것이 다르다는 것을 눈치채게 됩니다. 그렇다면 과연 자신은 무엇일까?란 것에 흥미가 끓어오릅니다. 그리고 자신은 어떤 능력을 지니며,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여러가지로 시도하면서, 모험을 시작합니다. 어떤 근원은 자신의 에너지를 자꾸자꾸 바꾸어 자신 이외의 여러가지 근원을 생산하거나, 혹은 다른 근원과의 관계를 깊게 하여 다른 근원의 에너지를 자신이 사용할 수 있도록 구조를 바꾸는 등의 일을 시작합니다. 이 근원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의 말로 말하면, 의식이라고 해도 실수는 아닙니다. 다만, 여러분이 의식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에는, 아무래도 지금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자신의 의식과 같은 것을 전제로 생각해 버립니다. 유감스럽지만, 우리는 그러한 의미에서는 사용하고 있지 않습니다. 만약 집합 의식이라는 말을 사용한다면, 지금 우리가 사용한 근원이라고 하는 것은 집합 의식의 근원입니다. 여러분의 의식은 집합 의식 안에서 하나의 의식으로 형태화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의식은 아닙니다. 단순히 하나의 측면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느 단계까지 이 근원이 활동을 계속하며 성장해가면, 자신이 다른 근원과 에너지를 교환하거나 혹은 우주에 존재하는 여러가지 에너지를 스스로 다루거나 바꾸고 새롭게 생산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우주 안에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에너지가 존재하고 있으며, 그것들을 편성함에 따라 또 새로운 에너지를 생산할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아주 훌륭한 에너지가 이 우주에 수많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의식의 근원은 이러한 에너지를 차례차례로 거두어 들이고자 활동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에너지는 다만 단순하게 넣으려고 생각해도, 그대로는 들어 오지 않습니다. 어떠한 행동을 하지 않으면, 자신 안에 들어 오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경험의 에너지는 실제로 체험하는 것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자신을 성장시키는 에너지는 타인을 성장시키는 것에 의해서만 들어옵니다. 자신을 치료하는 에너지는 타인을 치료하는 것에 의해서만 들어 옵니다. 자신을 아름답게 빛낼 수 있는 에너지는 다른 사람을 아름답게 빛낼 수 있는 것에 의해서만 들어옵니다. 모든 것이 이러한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에너지는 다만 가만히 입다물고 있다고 들어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의식의 근원들은 이 기본 원칙을 깨달은 시점부터 여러가지 체험을 하기 시작합니다. 우주 공간에서 에너지를 도입해감에 따라, 점차 창조의 에너지도 자신 안에 거두어 들이는 것이 가능하게 됩니다. 이 창조의 에너지라고 하는 것은 우주를 만들어 냈을 때 사용된 에너지입니다. 각각의 의식의 근원들은 이 창조의 에너지를 자신의 의식 안에 획득하여,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우주를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체험하려고 하며, 실제로 자신의 범위내에서 스스로 우주를 만들어가기 시작합니다. 의식의 근원은 자신의 의식의 에너지를 사용해, 스스로 우주와 같은 하나의 세계를 완성시킵니다. 스스로 창조주와 같이 행동하며, 자신이 완성시킨 우주 차원 안에서 한층 더 여러가지 의식을 생산하고, 그것을 성장시켜가는 구조를 만들어냅니다. 이 각각의 의식들이 만든 우주 속에서, 여러가지 새로운 의식이 싹트며 성장해 갑니다. 이 의식의 근원이 생산한, 하나의 우주와 같은 커다란 시스템, 이것을 여러분은 지금까지 영혼이라 부르고 있었습니다. 이 영혼으로 불리는 하나의 큰 세계는, 그 의식의 근원이 근본적으로 생산한 하나의 세계입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여러가지 의식이 새롭게 생산되고 있습니다. 이 의식의 근원이 만들어 낸 우주는 그 의식이 생산한 것이고, 진실의 우주와는 꽤 차이가 납니다. 왜냐하면, 의식의 근원이 만들어 낸 우주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창조의 에너지만을 사용해 영혼을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의식이 창조의 에너지를 얼마나 완벽하게 갖추고 있을지는 그 의식의 근원의 능력에 좌우됩니다. 모든 것이 같은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진정한 우주의 창조 에너지와 완전히 같은 창조 에너지를 손에 넣은 의식의 근원은, 아직 이 우주에는 존재하고 있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의식의 근원은 아직 배우는 과정이고, 모든 창조 에너지를 손에 넣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머지 않아서 창조의 에너지를 모두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훌륭하게 성장하여, 창조주와 같은 정도의 능력을 몸에 익힌 것이 됩니다. 여러분의 말로 말하는 상승한 마스터라고 하는 근원은 그 정도에 필적하는 존재이고, 창조 에너지의 완성을 목표로 활동하고 있는 의식입니다. 이 창조의 근원은 자신이 만들어 낸 세계 안에서, 여러가지 체험을 거듭해 갑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종교의 신이라고 부르고 있던 존재들은 모두 이 의식의 근원이 배움의 과정 중에 이 지구에 찾아왔던 것입니다. 창조의 에너지를 가득 활용해, 자신의 우주를 완성시키기 위해서 여러가지 배움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종교의 신도 여러분에게 사랑을 뿌리내리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것이 지금까지의 종교의 신의 한계입니다. 사랑은 지극히 특수한 에너지로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단순하게 사랑한다든가 사랑해 주지 않는다고 하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에너지는 그러한 단순한 말로서는 표현할 수 없습니다. 매우 교묘한 에너지가 되고 있습니다. 가령 자신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현상을 생각해 봅시다. 자신은 다른 사람을 정말로 소중히 생각하여 상대에게 가까이 갑니다. 그 기분이 있는 한, 본인으로부터 상대를 향해 따스한 기분이 흘러 나갑니다. 그러나, 상대가 전혀 거기에 흥미를 나타내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상대에게는 그 생각이 전혀 통해지지 않게 됩니다. 상대에게 준 배려나 온화한 에너지가 영향을 주는 일이 없게 되고, 모처럼 발해진 사랑의 에너지가 전혀 상대에게는 전해지지 않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처음에 배려나 온화한 마음에서 낸 에너지였더라도, 실제로는 사랑이 아니게 됩니다. 우주에서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상대가 받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상대가 받지 않는 것은 우주에서는 사랑이라고 부르고 있지 않습니다. 우주에서는 상대의 몸 안에 들어가는 에너지를 사랑의 성질의 첫번째로서 파악하고 있습니다. 상대의 몸 안에 확실히 비집고 들어가, 상대의 생명을 빛의 방향으로 확실히 가지고 가는 기능을 하는 에너지, 이것을 사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자신이 상대를 생각해 따뜻하게 흘린 에너지라도, 상대가 받지 않으면 그것은 사랑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자신이 배려하는 마음이나, 상대를 위한다는 가치관을 일절 지니지 않고, 다만 어드바이스를 주었다고 합시다. 상대가 그것을 매우 기뻐하여, 자신의 성장을 위해서 그것을 활용했을 경우에, 이것은 우주에서는 훌륭한 사랑의 에너지로 인식됩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사랑을 낸 본인의 관점으로 제멋대로 사랑인가 사랑이 아닌가를 논의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사랑을 주고 있다." "나는 이만큼 사랑하고 있다." 사랑은 사랑을 흘리는 편의 논리로 측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사랑을 받는 쪽이 결정하는 것일까요? 또 다른 의견이 언제나 인간으로부터 나옵니다. "그 사람은 나를 사랑해 주고 있지 않다." "나는 누구로부터도 사랑 받고 있지 않다."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없다." 사랑 받는 쪽으로부터 볼 때에는 항상 이런 말만이 나와지고 있습니다. 이것도 또 우주와는 전혀 다른 견해가 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사랑이라고 느끼든 안 느끼든, 그 사람을 위해서 도움이 되고, 확실히 그 사람을 빛의 방향으로 이끄는 에너지가 그 사람의 몸 안에 흐르게 될 경우, 그것은 사랑입니다. 본인이 사랑이라고 느끼지 않아도, 그것에 따라 눈을 뜨고 깨달아, 확실히 빛을 향해 진행될 경우, 그 사람에게는 사랑의 에너지가 이송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에너지를 내는 쪽의 논리도, 받는 쪽의 논리도 아닙니다. 차라리, 객관적으로 보고 있는 쪽이 그것을 보다 잘 분석할 수 있습니다. 지금 지구인의 인식 레벨에서, 사랑을 올바르게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존재하고 있지 않습니다. 자신이라는 사랑의 당사자가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는 한, 아무래도 자신을 중심으로 보게 되어 버립니다. 사랑을 준다든가, 사랑을 받는다는 표현이 되어 버립니다. 우주로부터 볼 경우에, 실은 이런 용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주는 것도, 받는 것도 아닙니다. 방금 전에 말씀 드린 것처럼, 다른 한쪽으로부터 흘러나와 다른 한쪽으로 들어가는 것, 그리고 그 다른 한쪽을 위해서, 그 다른 한쪽의 성장을 위해서, 확실히 도움이 되는 에너지가 되어 남아 있게 되는, 이런 상황을 사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사랑은 서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준비가 필요합니다. 사랑이라는 말로 논의하는 것보다는, 정말로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지, 그 사람의 성장을 위해서 도움이 되는지, 그 사람이 빛나기 위해서 도움이 되는지를 궁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랑의 에너지는 이와 같이, 하나의 의식체로부터 다른 의식체로 확실히 흘러, 그 의식체 안에 머무르고, 그곳에서 뿌리내려 갑니다. 이렇게 상대 안에 머물러 상대의 성장을 위해서 뿌리내려 가는 에너지, 이것을 총칭해 우리는 사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 사랑의 에너지라는 것은, 그 의식체로부터 발해진 에너지임과 동시에, 이 우주의 어떤 특별한 영역에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에너지를 생산하고, 그것을 관리하고 있는 그룹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에게는 거의 이해될 수 없는 구조가 되고 있습니다. 사랑의 에너지라고 해도, 기본적으로는 하나의 의식체로부터 다른 의식체로 흘러가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을 꼭 기억해 두세요. 의식체로부터 실제로 나오는 사랑의 파동의 종류는, 그 의식마다 미묘하게 차이가 납니다. 어떤 의식은 정말로 상대를 성장시키고자 하는 에너지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어떤 의식은 상대가 훌륭히 빛나는 것을 오로지 생각하며 파동을 내고 있습니다. 어떤 의식은 상대가 스스로 움직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에너지를 열심히 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랑이라고 해도, 그 의식에 따라 각각의 특성이 미묘하게 차이가 납니다. 그렇지만 모두 사랑입니다. 그것은 모두 다릅니다. 그렇지만 사랑이라는, 우주의 커다란 에너지 파동 안에서 공통성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이 모두 어떤 사랑을 몸에 익히고 있습니다. 자신만의 사랑의 파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자꾸자꾸 확대시켜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흘리며, 인종을 넘고, 혹성을 넘고, 생명을 넘어 사랑할 수 있는 에너지로 바꾸어 갑니다. 이것이 성장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사랑의 에너지를 자꾸자꾸 훌륭하게 성장시켜가는 것이 여러분의 역할 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처음 지구에 내려섰을 때, 지구에는 사랑이 거의 발휘될 수 없는 구조가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사랑이 없는 곳에서부터 시작하도록 안배되어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부터, 사랑을 완성시키는 것이 여러분의 역할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사랑을 몸에 익히는 것보다는, 먼저 미움을 몸에 익히고 적대심을 몸에 익혔습니다. 그러나, 사랑과 미움은 어떤 의미로는 같은 파동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움은 확실히 상대에게 전해져, 상대의 진화를 방해합니다. 사랑은 확실히 상대에게 보내져, 상대를 진화시킵니다. 사랑과 미움은 같은 에너지이지만, 서로 극성이 반대되는 것으로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많은 미움을 몸에 익힌 사람은 그와 같은 양의 사랑을 손에 넣을 수가 있습니다. 거의 미움이나 싸우는 마음을 몸에 익히고 있지 않은 사람은, 사랑도 작은 양에 머물러 버립니다. 정말로 상대를 생각하는 기분이 근본에 싹트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미움은 그 나름대로 상대의 것을 꽤 생각하며 발해지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은 정말로 상대의 것을 생각한 다음, 에너지를 흘릴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중의 상당수는 아틀란티스에서, 많은 싸우는 마음을 몸에 익혔습니다. 사랑을 몸에 익히는 것보다, 먼저 싸우는 마음을 몸에 익혔습니다. 그리고 몇번이나 몇번이나 전생을 거듭하여, 조금씩 사랑을 기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부정적인 에너지의 편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사랑의 파동으로 그것을 견딘다고 하는 사람이 아직 이 지구상에는 거의 존재하고 있지 않습니다. 지금부터 지구 인류가 정말로 새로운 시대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우선은 자기 자신의 사랑을 확실히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을 만든다는 것은, 자신이 지금까지 만들어 온 분쟁이나 미움의 파동을 사랑으로 바꾸어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을 미워하는 기분이 있는 사람은 사람을 허락하는 기분으로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한사람 한사람이 그것을 실천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사랑의 에너지를 키우기 위해, 여러분은 일생생활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대부분의 사람은 인간 관계가 매우 피곤하고, 힘든 상황이 되고 있습니다. 사람과 교류하는 것이 귀찮게 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인간끼리의 교류를 무시한 채로 사랑의 성장은 있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인간관계의 고통스러움만을 강조한다면, 상대를 인정하는 것이나 허락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생각을 어떻게든 상대에게 설득시키려고 필사적으로 애쓰고 있습니다. 자신을 인정 받기 위해 기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없다고 우리는 몇번이나 반복해서 말해 왔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은 계속 같은 것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만약 인간 관계에서 불쾌한 생각이나 괴로움, 싫증이 있을 경우, 그것은 자신에게 아직 사랑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사랑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사랑이 없다는 증거일 뿐입니다. 사랑이 없다는 것은 이제 몇번이나 들어, 식상하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되는 것일까요? 어떻게 하면 사랑이 몸에 붙는 것일까요? 거기서 우리는 다시 제일 처음으로 돌아옵니다. 사랑은 어디까지나 상대에게 흘러, 상대의 성장을 위해서 활용될 수 있는 에너지로서 불리고 있습니다. 이런 에너지는 반드시 보편적인 것은 아닙니다. 에너지에 따라 각각 특질이 차이가 납니다. 치유의 에너지는 블록을 없애거나 불필요한 에너지를 제거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반드시 상대를 성장시킨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자비의 에너지도 상대를 감싸주며, 상대가 얼마나 고통스러운가를 이해해 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반드시 상대가 빛으로 나아가게 될지는 알 수 없습니다. 에너지마다 각각 특질이 다릅니다. 사랑은 상대를 성장시키는 것이 전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상대에게 확실히 흐르고 있지 않으면 사랑은 아닙니다. 사랑이 없다고 하는 것은, 결국 자신이 상대에게 에너지를 흘려도, 상대의 성장에 연결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은 상대의 성장을 생각하며 행동하고 있습니까? 상대는 지금 무엇을 필요로 하고 있을까요? 그 사람은 지금 무엇을 배우고 있으며, 지금의 경험을 통해서 무엇을 이해하려 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를 위해 여러분 자신은 어떤 봉사를 할 수 있는 것일까요? 여러분은 일상의 관계에서 이러한 것들을 생각하며, 에너지를 내고 있습니까? 만약 그러한 생각을 한번도 궁리한 적이 없다면, 지금까지 사랑이 없다고 말해져도 당연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없다고 말해지면 불쾌하게 여기고, 자신은 사랑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의 성장에 대한 것은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사랑은 확실히 상대를 성장시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상대가 빛을 향해 스스로 힘차게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엄격한 사랑이라고 누구나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주에서 엄격한 사랑이라는 용어는 존재하고 있지 않습니다. 사랑은 방금 전 말씀 드린 것처럼, 다만 상대의 곳에 흘러 들어가, 상대를 성장시키기 위해서 사용되는 에너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엄격하다든가, 부드럽다는 것은 존재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그 특질로서 예수는 항상 올바름을 전제로 한 에너지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확실히 빛으로 향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었습니다. 확실히 빛을 추구하는 사람은 사랑 그 자체입니다. 엄하다든가 엄하지 않다든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사랑 그것입니다. 만약 빛의 방향을 나타내고 있지 않은 에너지가 주어졌다고 하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아무리 포근하고, 아무리 기분이 좋은 에너지더라도, 그리고 상대가 기뻐하여 눈물을 흘린다 하더라도,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온화한 사랑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우주에서는 그런 용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빛을 목표로 하고 있지 않은 사람은 사랑이 아닙니다. 진화의 방향을 향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장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랑의 에너지를 스스로 확인할 수 있는 에너지를 보내 드립니다. 자신이 어떻게 느끼고 있는 지를, 몸과 마음으로 느껴봐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한사람 한사람이 가지고 있는 사랑의 에너지를 강하게 흘려봅니다... 감사합니다. 사랑에 대해서... 안녕하십니까! 앞서 사랑에 대한 우리들의 견해를 말씀 드렸습니다. 확실히 여러분은 다른 사람을 살린다거나 성장시킨다는 표현을 접할 경우에, 무엇인가 오만하다는 느낌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남을 살린다는 것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에너지입니다. 적어도 다른 사람을 살린다고 할 때에는, 에고는 일체 들어가지 않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살린다는 표현을 취할 때에는, 에고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우선은 그 부분부터 설명해 나가도록 합시다. 다른 사람을 살린다는 것은, 그 사람의 가치관을 정말로 인정하고, 그 사람의 재능을 키워줄 수 있는 올바른 방향성을 이해한 후, 그 사람이 스스로의 장점을 보다 훌륭히 펼칠 수 있도록, 함께 의견을 교환하면서 함께 배워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앞선 메시지를 대한 여러분의 생각을 잠시 살펴보면, 사랑의 에너지를 단지 상대에게 보내는 것으로 이해하신 분이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의미로 사랑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아닙니다. 모두가 함께 배우고, 모두가 함께 이야기하며, 모두가 함께 접하여, 기쁨을 나누는 것이 사랑의 에너지를 전하는 3차원적인 방식입니다. 이것을 배제하고, 단지 사랑의 에너지를 상대에게 보낸다는 이미지를 하더라도, 사랑의 에너지는 전달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살린다는 것은, 이렇게 모두가 함께 공감하며, 함께 기쁨을 느끼고, 함께 이야기하며, 다같이 성장해 가는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거기에 에고는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상대가 필요로 하는 화제를 함께 의논한다, 상대가 필요한 에너지를 취할 수 있도록 함께 여행을 떠난다, 상대가 흥미를 가지는 물건을 얻을 수 있도록, 함께 쇼핑을 간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훌륭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3차원적인 행동에 대한 여러분의 인식이 우리와 상당히 어긋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랑에 대해 의논하면서도, 무엇인가 실제 현실과 괴리되는 듯한 느낌이 전해지는군요. 만약 여러분 자신이 아직도 사랑을 몸에 익히고 있지 않다고 느낄 경우, 사랑이라는 것을 실제 현실에서 어떻게 실천해야 할지 생각해 봅시다. 먼저 여러분의 일상생활의 행동 하나하나를 살펴보고, 그 행동의 동기가 무엇으로부터 비롯된 것인가를 분석합니다. 예를 들면, 책을 살때에도, 물건을 살때에도 근본적인 이유는 어디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인가를 관찰해 봅니다. ‘즐거우니까.' '그것을 가지고 있으면, 기쁘니까!’ 대부분의 경우는 아마 그곳에 도착하겠지요. 그렇다면, 그것을 한층 더 깊게 추궁해 봅시다. 그것을 수중에 넣음으로써 과연 자신은 무엇을 기대하고 있을까요? ‘다른 사람보다 아름답게 될 수 있다. 아름답다고 인정받을 수 있다. 다른 사람보다 많은 능력을 가질 수 있다. 다른 사람보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지식을 가질 수 있다.’ 그러한 것을 바라고 있다면, 그것은 모두 자신의 에고로부터 나온 행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사랑이라는 행동을 취할 경우, 예를 들면 상대와 이야기를 나누거나, 상대에게 무엇인가를 행하거나, 상대에게 무엇인가를 주려할 때, 그 때 여러분은 과연 무엇을 기대하고 있을까요? “나는 사랑이 없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사랑을 주고 싶다", "그 사람이 나의 사랑을 받아 주었으면 좋겠다."," 그 사람에게 나의 사랑이 느껴졌으면 좋겠다…” 만약, 이러한 생각을 발하며 행동하고 있다면, 그것은 벌써 에고의 에너지가 되어 버립니다. 보통 사랑이라는 것은, 그것을 행하고 있을 단계에서, 반드시 이것이 사랑이라는 식으로 의식하지 않을 때가 대부분입니다. 단지 상대가 곤란할 때 ‘어떻게든 해 주자.’, 상대가 비참한 상황에 처해 있을 때 ’어떻게든 도와 주자.’, 상대가 정말로 혼란에 빠져 있을 때 '어떻게든 구해 주자.'..라고 느끼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하나 하나 ‘나는 사랑을 흘려야지.’'나는 사랑을 흘리고 있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렇지만, 바로 그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랑이 없다고 하는 말을 몇번씩이나 들었지만, 그 때문에 사랑을 실천하라는 그 말에 도리어 취해 버리고 있습니다. 다만 상대가 필요로 하는 것을 자신이 도와준다는. 원점으로 돌아와 주세요. 그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상대가 정말로 기쁨을 느꼈다면, “당신 덕분에 인생이 즐겁게 되었습니다.”,”당신의 한마디로 삶의 기쁨이 느껴졌습니다.”,“당신 덕분에 살아 있다는 것이 즐거워졌습니다.”,“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았습니다.” 이렇게 느꼈다면, 그것은 훌륭한 사랑인 것입니다. 자신이 취하는 행동, 하나 하나에 ‘나의 사랑은 이러하다’라고 의식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자신만의 독특한 행동패턴이 있겠지요. 즉,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 친구를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 어투가 정중한 사람, 부드럽고 상냥하게 이야기해 줄 수 있는 사람, 다만 상대를 포옹해 줄 수 있는 사람... 여러가지 타입의 사람이 있습니다. 그에 따라, 상대의 마음을 항상 포근하게 해주고, 살아 있다는 기쁨을 느끼게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한사람 한사람이 발견하고, 길러나가는 것이, 방금전 우리들이 여러분에게 흘린 에너지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그러한 관점을 통하여, 자신 나름의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 한번 숙고해 주시길 바라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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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철스님의 주례사
    성철 스님은 생전에 2번 주례를 섰다고 합니다. 주례사가 시사하는바 커서 소개하려 합니다. =========================================== 오늘 두 분이 좋은 마음으로 이렇게 결혼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결혼을 하는데, 이 마음이 십 년, 이십 년, 삼십 년 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여기 앉아 계신 분들 결혼식장에서 약속한 것 다 지키고 살고 계십니까? 이렇게 지금 이 자리에서는 검은머리가 하얀 파뿌리가 될 때까지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거나, 어떤 고난이 있더라도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서로 돕고 살겠는가 물으면, "예" 하며 약속을 해놓고는 3일을 못 넘기고 3개월, 3년을 못 넘기고 남편 때문에 못살겠다, 아내 때문에 못살겠다 이렇게 해서 마음 으로 갈등을 일으키고 다투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결혼하기를 원해 놓고는 살면서 “아이고 괜히 결혼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안 하는 게 나았을걸“ 후회하는 마음을 냅니다. 그럼 안 살면 되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약속을 해놓고 안 살수도 없고 이래 어영부영하다가 아이가 생기니까 또 아이 때문에 못하고, 이렇게 하면서 나중에는 서로 원수가 되어 가지고, 아내가 남편을 “아이고 웬수야” 합니다. 이렇게 남편 때문에, 아내 때문에 고생 고생하다가 나이 들면서 겨우 포기하고 살만하다 싶은데, 이제 또 자식이 애를 먹입니다. 자식이 사춘기 지나면서 어긋나고 온갖 애를 먹여 가지고, 죽을 때까지 자식 때문에 고생하며 삽니다. 이것이 인생사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결혼할 때는 다 부러운데, 한참 인생을 살다보면 여기 이 스님이 부러워, “아이고 저 스님 팔자도 좋다” 이렇게 됩니다. 이것이 거꾸로 된 것 아닙니까? 스님이 되는 것이 좋으면 처음부터 되지, 왜 결혼해 살면서 스님을 부러워합니까? 이렇게 인생이 괴로움 속에 돌고 도는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제가 그 이유를 말할 테니, 두 분은 여기 앉아 있는 사람들처럼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서로 이렇게 좋아서 결혼하는데 이 결혼할 때 마음이 어떠냐? 선도 많이 보고 사귀기도 하면서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이것저것 따져보는데, 그 따져보는 그 근본 심보는 덕보자고 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돈은 얼마나 있나, 학벌은 어떻나, 지위는 어떻나, 성질은 어떻나, 건강은 어떻나, 이렇게 다 따져 가지고 이리저리 고르는 이유는 덕 좀 볼까 하는 마음입니다. 손해볼 마음이 눈꼽 만큼도 없습니다. 그래서 덕볼 수 있는 것을 고르고 고릅니다. 이렇게 골랐다는 것은 덕보겠다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니 아내는 남편에게 덕보고자 하고, 남편은 아내에게 덕보겠다는 이 마음이, 살다가 보면 다툼의 원인이 됩니다. 아내는 30%주고 70% 덕보자고 하고, 남편도 자기가 한 30%주고 70% 덕보려고 하니, 둘이 같이 살면서 70%를 받으려고 하는 데, 실제로는 30%밖에 못 받으니까 살다보면 결혼을 괜히 했나 속았나 하는 생각을 십중팔구는 하게 됩니다. 속은 것은 아닌가, 손해봤다는 생각이 드니까 괜히 했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 덕보려는 마음이 없으면 어떨까? 좀 적으면 어떨까요? “아이고 내가 저분을 좀 도와줘야지, 저분 건강이 안 좋으니까 내가 평생 보살펴 줘야겠다. 저분 경제가 어려우니 내가 뒷바라지 해줘야겠다, 아이고 저분 성격이 저렇게 괄괄하니까 내가 껴안아서 편안하게 해줘야겠다.” 이렇게 베풀어줘야겠다는 마음으로 결혼을 하면, 길가는 사람 아무하고 결혼해도 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덕보겠다는 생각으로 고르면, 백 명 중에 고르고 또 고르고 해도, 막상 고르고 보면 제일 엉뚱한 걸 고른 것이 됩니다. 그래서 옛날 조선시대에는 얼굴도 안보고 결혼해도 잘 살았습니다. 시집가면 죽었다 생각하거든. 죽었다 생각하고 시집을 가보니 그래도 살만하니까 웃고 사는데, 요새는 시집가고 장가가면 좋은 일이 생길까 기대하고 가보지만 가봐도 별 볼 일이 없으니까, 괜히 결혼했나 후회가 됩니다. 결혼식하고 며칠 안 돼서부터 후회하기 시작합니다. 어떤 사람은 결혼하기 전부터 후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왜냐, 신랑신부 혼수 구하러 다니다가 의견차이가 생겨서 벌써 다투게 됩니다. 안 했으면 하지만 날짜 잡아놔서 그냥 하는 사람들도 제가 많이 봅니다 .. 오늘 이 자리의 두 사람이 여기 청년 정토회에서 만나서 부처님법문 듣고 했으니까, 제일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부터는 덕보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됩니다. 내가 아내에게, 내가 남편에게 무얼 해줄 수 있을까, 내가 그래도 저분하고 살면서 저분이 나하고 살면서 그래도 좀 덕봤다는 생각이 들도록 해줘야 않느냐, 이렇게만 생각을 하면 사는데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그런데 심보를 잘못 가져놓고 자꾸 사주팔자를 보려고 합니다. 궁합본다고 바뀌는 게 아닙니다. 바깥 궁합 속 궁합 다보고 삼 년을 동거하고 살아봐도 이 심보가 안 바뀌면 사흘 살고 못삽니다. 그러니 이 하객들은 다 실패한 사람들이니까 괜히 둘이 잘살면 심보를 부립니다. 남편에게 “왜 괜히 바보같이 마누라에게 쥐어 사나, 이렇게 할 것 뭐 있나”하고, 아내에게는 “니가 왜 그렇게 남편에게 죽어 사나, 니가 얼굴 이 못났나 왜 그렇게 죽어 사노” 이렇게 옆에서 살살 부추기며, 결혼할 땐 박수를 치지만 내일부터는 싸움을 붙입니다. 이런 말은 절대 들으면 안됩니다. 이것은 실패한 사람들이 괜히 심술을 놓는 것입니다. 남이 뭐라고 해도 나는 남편에게 덕되는 일 좀 해야 되겠다. 남이 뭐라 그러던, 어머니가 뭐라 그러던 아버지가 뭐라 그러던, 누가 뭐라 그러던 나는 아내에게 도움이 되는 남편이 되어야겠다 이렇게 지금 이 순간 마음을 딱 굳혀야 합니다. 괜히 애까지 낳아놓고 나중에 이혼한다고 소란 피우지 말고 지금 생각을 딱 굳혀야지, 그렇게 하시겠어요? 덕 봐야 돼요? 손해 봐야돼요? "손해보는 것이 이익이다” 이것을 확실하게 가져야 합니다. 오늘 두분 결혼식에 참여한 사람들은 반성 좀 해야합니다. 이렇게 두 분의 마음이 딱 합해지면, 어떻게 되느냐, 아내의 오장육부가 편안해집니다. 이 오장육부가 편해지면 어떻게 되느냐, 임신해서 아이를 갖게 될 때 영가들도 죽을 때 초조 불안해 죽은 귀신도 있고, 편안하게 도 닦다 죽은 사람도 있습니다. 편안한 데는 편안한 게 인연을 맺어오고, 초조 불안하면 초조 불안한 것이 딱 들어옵니다. 그래서 이것을 잉태라고 합니다. 태교가 아니고, 잉태할 때 여자가 마음이 편안한 상태에서 잉태를 하면 선신을 잉태하고, 심보가 안 좋을 때 잉태를 하면 악신을 잉태합니다. 처음에 씨를 잘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 결혼해 가지고 덕보려고 했는데 손해를 보니까, 심사가 뒤틀려 있는 상태에서 같이 자다보니 애가 생깁니다. 기도하고 정성 다해서 애가 생기는 것이 아니고, 그냥 둘이 좋아 가지고 더부덕덥덥 하다보니까 애가 생겨버립니다. 그러니 이게 처음부터 태교가 잘못됩니다. 이렇게 잉태해 가지고는 성인 낳기는 틀린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밥 먹고 짜증내고 신경질 내면, 나중에 위를 해부해보면 소화가 안되고 그냥 있습니다. 이 자궁이라는 것은 어머니의 오장육부하고 연결이 되어있습니다. 이것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짜증을 내면 오장육부가 긴장이 되어있습니다. 안에 있는 아이가 늘 긴장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이것이 선천적으로 신장질환이 생기든지 아이가 불안한 마음을 갖습니다. 엄마가 편안한 마음을 갖고 있고 원기가 늘 따뜻하게 돌고, 아이가 그 안에 있으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이 아이는 나중에 태어나도 선천적으로 도인처럼 편안한 사람이 됩니다. 그러니까 남편이 어떻든, 세상이 어떻든 애를 가진 이는 편안해야 합니다. 편안하려면 수행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내가 편안한 것은 누구의 영향을 받느냐 바로 남편의 영향을 받습니다. 남편이 애는 좋은 애를 낳고 싶으면서 아내를 걱정시키면 좋은 아이를 낳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아내가 애를 가졌다고 하면 집에 일찍 들어오고, 나쁜 것은 안 보여주고, 늘 아껴주고 사랑해줘서 거들어 줘야합니다. 시어머니들도 손자는 좋은 것을 보고 싶은데, 며느리를 볶으면 손자가 나쁜 애가 나옵니다. 그러니까 며느리가 편안하도록 해줘야합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본인이 편안한 것이 제일 좋고, 주위에서도 이렇게 해줘야합니다. 이렇게 정신이 중요하고, 두 번째는 음식을 가려먹어야 합니다. 육식을 조금하고 채식을 많이 하고, 술 담배를 멀리하고 이렇게 해야 애가 좋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아이를 낳은 후에 아무것도 모른다고 둘이서 서로 싸운다면 안됩니다. 한국에서 태어나면 한국말 배우고, 미국에서 태어나면 미국말배우고, 일본에서는 일본말 배우고, 원숭이 무리에서 자라면 원숭이 되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어릴 때 부모가 하는 것을 그대로 본받아서 아이의 심성이 됩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기가 조그만 하다고 애를 옆에 두고 둘이서 짜증내고 다투면, 사진 찍듯이 그대로 아기 심성이 결정이 납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술 주정하고 그러면 아이가 나는 크면 절대로 그렇게 안 할거야 하지만 크면 술 주정합니다. 다투는 집에서 태어나면 자기는 크면 절대로 다투지 않겠다고 하지만 크면 다투게 되어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대로 모방해서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아이를 낳으려면 직장을 다니지 말아요. 아니면 3년은 직장을 그만두어요. 아니면 아이를 업고 직장에 나가든지. 이렇게 해서 아이를 우선적으로 해야합니다. 아이를 우선적으로 하려면 아이를 낳고, 안 그러려면 안 낳아야 합니다. 안 그러면 아이가 복 덩어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인생을 망치는 고생덩어리가 됩니다. 애 때문에 평생 고생하고 살게됩니다. 3년까지만 하면 과외 안 시켜도 괜찮고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제 말 잘 들으십시오. 이렇게 안 하려면 낳지를 말고 낳으려면 반드시 이렇게 하십시오. 그래야 나도 좋고 자식도 좋고 세상도 좋습니다. 잘못 애 낳아서 키워놓으면 세상이 시끄럽습니다. 반드시 이것을 첫째 명심하십시오. 가정에서 이것이 첫째입니다. 두 번째, 제가 신도 분들 많이 만나보면, 애 때문에 시골 살면서 남편 떼어놓고 애 데리고 서울로 이사가는 사람, 애 데리고 미국에 가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절대 안됩니다. 두 부부는 아이가 세 살 때까지만 애를 우선적으로 하고 그 이후에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남편은 아내, 아내는 남편을 우선으로 해야합니다. 아이는 늘 이차적으로 생각하십시오. 대학에 떨어지든지 뭘 하든지 신경 쓰지 마십시오. 누가 제일 중요하냐, 아내요 남편이 첫째입니다. 남편이 다른 곳으로 전근가면 무조건 따라 가십시요. 돈도 필요 없습니다. 학교 몇 번 옮겨도 됩니다. 이렇게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중심으로 놓고 세상을 살면 아이들은 전학을 열 번 가도 아무 문제없이 잘삽니다. 그런데 애를 중심으로 놓고 오냐오냐하면서 자꾸 부부가 헤어지고 갈라지면, 애는 아무리 잘해줘도 망칩니다. 여기도 그렇게 사는 사람 있을 것입니다. 오늘부터 정신차리십시오. 제 얘기를 선물로 받아 가십시오. 이렇게 해야 가정이 중심이 서고 가정이 화목해집니다. 이렇게 먼저 내가 좋고 가정이 화목한 것을 하면서 내가 사는 세상에도 기여를 해야합니다. 우리만 잘산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늘 내 자식만 귀엽게 생각말고, 이웃집 아이도 귀엽게 생각하고, 내 부모만 좋게 생각하지 말고 이웃집 노인도 좋게 생각하고, 이런 마음을 내면 어떠냐, 내가 성인이 되고 자식이 좋은 것을 본받습니다. 그리고 부모에게 불효하고 자식에게 정성을 쏟으면 반드시 자식이 어긋나고 불효합니다. 그런데 늘 자식보다는 부모를, 첫째가 남편이고 아내고, 두 번째는 부모가 돼야 자식의 교육이 똑바로 됩니다. 애를 매를 들고 가르칠 필요 없이, 내가 늘 부모를 먼저 생각하면 자식이 저절로 됩니다. 그러니까 애를 키우다 나중에 저게 누굴 닮아 그러나 하면 안됩니다. 누굴 닮겠습니까. 둘을 닮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나쁜 인연을 지어서 나쁜 과보를 받아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반드시 인연을 잘 지어서 처음에 조금만 노력하면 나중에 평생 편안하게 살수 있습니다. 두 부부는 서로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려고 해야합니다. 자식을 낳으려면 잉태 할 때와 뱃속에 있을 때, 세살 때까지가 중요하니 마음이 편안해야 하고 부부가 화합해야 합니다. 주로 결혼해서 틈이 생길 때 애가 생기고, 저 남자와 못살겠다 할 때, 아이를 키우기 때문에 아이들이 사춘기가 되면, 부모에게 저항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애가 중학교까지 잘 다니다가 고등학교 가더니 그렇다, 친구 잘못 사귀어서 그렇다고 하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납니다. 그러니 이미 아이가 그렇게 되었거든 지금 엎드려서 참회를 하여야 고쳐집니다. 지금 이 부부는 안 낳았으니까 반드시 그렇게 낳아야 합니다. 세 번째, 남편을 아내를 서로 우선시 하고 자식을 우선시 하지 않습니다. 첫째가 남편이나 아내를 우선시하고 둘째가 부모를 우선시하지, 남편이나 아내보다도 부모를 우선시 하면 안됩니다. 그것은 옛날 이야기입니다. 일단 아내와 남편을 우선시 할 것, 두번째 부모를 우선시 할 것, 세번째 자식을 우선시 할 것, 이렇게 우선 순위를 두어야 집안이 편안해집니다. 그러고 나서 사회의 여러 가지도 함께 기여를 하셔야 합니다. 이러면 돈이 없어도 재미가 있고, 비가 세는 집에 살아도 재미가 있고, 나물 먹고 물 마셔도 인생이 즐거워집니다. 즐겁자고 사는 거지 괴롭자고 사는 것이 아니니까, 두 부부는 이것을 중심에 놓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남편이 밖에 가서 사업을 해도 사업이 잘되고, 뭐든지 잘됩니다. 그런데 돈에 눈이 어두워 가지고 권력에 눈이 어두워 가지고, 자기 개인의 이익에 눈이 어두워 가지고 자기 생각 고집해서 살면 결혼 안 하느니보다 못합니다. 그러니 지금 좋은 이 마음 죽을 때까지 내생에까지 가려면 반드시 이것을 지켜야 합니다. 이렇게 살면 따로 머리 깎고 스님이 되어 살지 않아도, 해탈하고 열반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대승보살의 길입니다. 제가 부주 대신 이렇게 말로 부주를 하니까 두 분이 꼭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주현미/인생 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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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확히는 쌍계사 칠불암 일곱부처만이 '가야칠불'입니다. 제가 한 7~8년전에 '신약본초'를 나름대로 주(註)를 달아놓은 게 있는데요. 저도 처음에는 인산께서 언급하신 '가야칠불(七佛)'이 과연,칠성각이나 산신각에 봉안된 '칠성성군(탐랑,거문,녹존...)'일까 의심을 해 보았습니다. 북두(北斗) 두모(斗母)의 아들들로 나오는 '탐랑,거문..등'이 김수로왕과 허황후의 아드님들이신 '가야七佛'께서 성불하신 설화와 비슷한 부분이 있으나, 1.불교와 도교의 접합시기, 2.접합명칭, 3.불교도래시기와의 차이, 4.원래 칠성여래는 불교의 중단(中壇)호법신으로 주불(主佛)의 위치까지는 아니고.등등.. 위의 '칠성성군'이 ( 이는 도교 명칭이고 불교에서는 도교와의 접맥으로 '칠성여래'라고도 함) '가야칠불'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가야칠불'은 ★★광(光),당(幢),상(相),행(行),향(香),성(性),공(空)★★ 일곱분을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참고로,쌍계사 칠불암(칠불사)이외에 타지역에 있는 '칠불'관련 건은   '가야칠불'이 아닌것 잘 아시죠? ................................................................................................... ▣과거칠불(≒古칠불≒前칠불)   1.비바시불(毘婆尸佛)·   2.시기불(尸棄佛)·   3.비사부불(毘舍浮佛)   4.구류손불(拘留孫佛)·   5.구나함모니불(拘那含牟尼佛)·   6.가섭불(迦葉佛)·   7.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석가부처 '이전'에도 위와같이 여섯분의 부처님이 계셨으나,   실질적인 주불(主佛)은 인산께서 말씀하셨듯이,   3천년 석가모니 부처입니다.) ▣가야칠불   1.광불(光佛)   2.당불(幢佛)   3.상불(相佛)   4.행불(行佛)   5.향불(香佛)   6.성불(性佛)   7.공불(空佛) (*인산께서 말씀하신대로 석가부처 '이후' 5천년 주불(主佛)입니다. 법명(法名)들이 독특함을 알 수 있습니다. 다 받침이 "ㅇ"발음으로 끝납니다. 이와같이 정확히는 '쌍계사 칠불암(사)'에 모셔진 칠불만이 인산께서 말씀하신 '가야칠불'입니다) ▣칠성여래(≒북두칠성신≒칠원성군(도교식표현)≒칠성여래(불교식표현))   1.北斗第1星/天樞星/貪狼(탐랑)星君/運意通證如來   2.北斗第2星/天璇星/巨文(거문)星君/光陰自在如來   3.北斗第3星/天機星/祿存(녹존)星君/金色成就如來   4.北斗第4星/天權星/文曲(문곡)星君/最勝吉祥如來   5.北斗第5星/玉衡星/廉貞(염정)星君/光達智辨如來   6.北斗第6星/開陽星/武曲(무곡)星君/法海遊戱如來   7.北斗第7星/搖光星/破軍(파군)星君/藥師琉璃光如來 (*바로,대소(大小)사찰의 칠성각이나 산신각에서 흔히 말하는 표현입니다.   불교에서는 북두칠성을 인간의 길흉화복을 점지하는   일곱 신으로 받들어 칠원성군(七元星君)이라 였는데,   나중에 불교가 그 신앙을 접합하고 탈바꿈시켜   칠성여래(七星如來)라 함으로써   비로소 사찰에서의 신앙 대상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불교의 칠성여래는 불법의 수호에 참여하는 여러 부류중,   중단(中壇) 호법신(護法神)의 신중(神衆) 속에 포함된 이들이며,   인산의 말씀대로 상단(上壇)의 주불(主佛)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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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건강을 위하는 원리는 호흡할 때 가슴에 극력히 힘을 주고 어깨에도 힘을 주고 척추의 자세를 곧게하고 힘을 주면 중추 신경이 지극히 강화하여 요통과 척추염과 장 중에 염증도 쾌차하고 項直(항직) 하게 힘쓰고 목에 강한 힘을 쓰고 척추에 힘쓰면 腰臀神經(요둔신경)이 강화하여 頭風(두풍)과 搖頭 風(요두풍)과 (머리 떠는 병) 面風(면풍)과 고혈압과 저혈압과 독맥 경화증과 耳鳴症(이명증)도 쾌차 하나니라. 일초라도 멈추고 있으면 기간에 생기는 炎(염)과 염으로 화생하는 각종 병균은 누적하면 암병까지 앓게 되나니 전신에 기운을 고르게 하여 手足(수족)까지 온도가 정상이면 중풍과 각종 어혈과 염증은 안심하고 신체내의 각종 질병은 염려가 없으니 정신은 상쾌하고 육신은 건강하여 修心卽神明(수심즉신명)하며 神明卽靈明(신명즉영명)하여 대각성불하나니라. -의약 신성 137쪽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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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디어 [re] 구용론(인산 선생님 음성)
    "어께에 힘을 주게 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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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풍림의 중요성(퍼온 글)
    재미있는 내용이 있어서 퍼왔습니다. ^^ '' 이번 매미라는 태풍때 남해안이 작살난적이 있지요. 헌데 어느마을은 피해가 아주 적은곳이 있습니다. 그마을의 조상들이 조성한 방풍림덕이지요. 방품림이 해일과 강한 바람을 막아준다는것에 대해서 일반인은 대개 이해를 못합니다. 아니 그엉성한 나무 가쟁이가 우째 바람을 막을수가 있고 해일을 막을수가 있을까하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바람의 성질을 알게되면 이해가 갑니다. 바람은 입자가 솜뭉치와 같다고 보시면 됩니다. 제주도에 감귤이 처음 도입되었을때 남제주는 감귤이 되고 북제주는 감귤이 안되었습니다. 헌데 북제주에도 감귤이 되기 시작했는데 그이유는 방풍그물덕분입니다. 제주도에 가보면 돌담장위로 그물망이 쳐져있는 감귤밭을 보신분들이 있을겁니다. 그 엉성한 그물망을 쳐두면 바람이 오다가 엉성한 그물망에 일부는 걸리고 일부는 빠져나갑니다. 허나 한번 걸린 바람이 정체하면 그다음에 오는 바람도 속도가 떨어집니다. 한마디로 바람의 러시아워현상이 생기는 거지요. 다시 말해서 바람은 솜과 같아서 그물망에 걸리면 일단 정체하게 되고 그정체된 바람에 뒤에서 오는 바람이 계속 걸리므로 유속이 떨어집니다. 유속이 떨어지면 온도가 상승하고 그온도차가 약 2~3도정도 차이가 나지요. 그온도차로 감귤의 재배가 가능해진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람이 강하게 불지않는 남해안의 섬들에서도 감귤이 재배가 가능한것입니다. 바람이 세게불면 그물망이나 방품림을 조성하면 바람의 속도를 떨어뜨려 온도도 상승하고 또한 바닷가에 방풍림이 있으면 마찬가지로 바람이 약해지고 바람이 일으키는 파도도 약해집니다. 해일이란 지진으로도 생기지만 바람으로도 생기는데 이번 태풍 매미로 인한 해일이 바람으로 생기는 해일이거든요. 바람이 바닷물을 세우는데 바람이 속도가 떨어지고 정체하게 되면 파도도 무너지지요. 20~30m까지 올라갈 해일이 15m만 올라가도 피해는 그만치 적어지는것입니다. 재수가 없는놈은 자빠져도 코가 깨지지만 아예 재수없는놈이라고 생각하고 미리 대비하여 코에 하이바쓰고 돌아다니면 귀가 째질망정 코는 안깨지거든요. 방풍림을 조성한다는 것은 재수없을때를 대비하는것이고 사람마다 재수없을때가 있으니 그때 그진가를 발휘하는겁니다. 이세상은 언제나 미리 재난을 감지하고 대비하는 지혜로운 조상들덕에 사는거라고 봅니다. '' 우리 몸도 같은 가 봅니다. 요즘은 환경오염으로 인해 인체에 들어오는 피해가 너무 커져서, 그 독소로 인해 발병되기 까지 기다리다간 몸이 아작 나니까요.  평소에 돼지창자국, 사리장 등을 먹어두는 것 역시 내 몸에 방풍림을 조성해두는 것과 한가지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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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 이사람아. 잘먹고 잘살어...싸우지 말고...^^"emoticon_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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