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낭만♡
2003-12-13 (20년 전)
여러분이 창조주로부터 가장 처음의 근원으로 분화되었을 때에, 창조주는 각각의 근원들에게 스스로 확실히 성장해 갈 수 있는 모든 에너지의 요소를 넣어 두었습니다. 여러분이 창조주에 의해 하나의 근원으로 만들어져 우주에 내던져졌을 때, 여러분은 이미 벌써 스스로 활동할 수 있도록 만들어지고 있었습니다.
우주에 한 근원이 내던져졌을 때, 그 근원 자신은 처음에는 자신은 무엇인가를 전혀 깨닫지 못한 상태에 있게 됩니다. 그 근원은 우주 안에서 영원이라는 시간을 감돌고 있는 동안에, 점점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무엇인가 행동을 일으키고 싶다고 하는 기분이 그곳에 솟아오릅니다. 어떤 근원은 오로지 빛을 추구하며 앞으로 나아가려고 생각합니다. 어떤 근원은 자신의 동료를 생산하고자 하는 기분이 들게 됩니다. 어떤 근원은 자신과 닮은 것을 찾는 여행을 떠나려고 생각합니다. 여러가지 생각을 가진 근원이 무수하게 우주 공간에 감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근원은 행동을 시작합니다. 행동을 시작하는 동안에, 점차 자신이라는 존재의 특질을 깨닫게 됩니다. 다른 근원과 자신은 전혀 다른 성질을 가지며, 움직이는 방법도 다르고, 빛도 다르며, 모든 것이 다르다는 것을 눈치채게 됩니다. 그렇다면 과연 자신은 무엇일까?란 것에 흥미가 끓어오릅니다. 그리고 자신은 어떤 능력을 지니며,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여러가지로 시도하면서, 모험을 시작합니다.
어떤 근원은 자신의 에너지를 자꾸자꾸 바꾸어 자신 이외의 여러가지 근원을 생산하거나, 혹은 다른 근원과의 관계를 깊게 하여 다른 근원의 에너지를 자신이 사용할 수 있도록 구조를 바꾸는 등의 일을 시작합니다.
이 근원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의 말로 말하면, 의식이라고 해도 실수는 아닙니다. 다만, 여러분이 의식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에는, 아무래도 지금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자신의 의식과 같은 것을 전제로 생각해 버립니다. 유감스럽지만, 우리는 그러한 의미에서는 사용하고 있지 않습니다. 만약 집합 의식이라는 말을 사용한다면, 지금 우리가 사용한 근원이라고 하는 것은 집합 의식의 근원입니다. 여러분의 의식은 집합 의식 안에서 하나의 의식으로 형태화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의식은 아닙니다. 단순히 하나의 측면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느 단계까지 이 근원이 활동을 계속하며 성장해가면, 자신이 다른 근원과 에너지를 교환하거나 혹은 우주에 존재하는 여러가지 에너지를 스스로 다루거나 바꾸고 새롭게 생산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우주 안에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에너지가 존재하고 있으며, 그것들을 편성함에 따라 또 새로운 에너지를 생산할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아주 훌륭한 에너지가 이 우주에 수많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의식의 근원은 이러한 에너지를 차례차례로 거두어 들이고자 활동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에너지는 다만 단순하게 넣으려고 생각해도, 그대로는 들어 오지 않습니다. 어떠한 행동을 하지 않으면, 자신 안에 들어 오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경험의 에너지는 실제로 체험하는 것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자신을 성장시키는 에너지는 타인을 성장시키는 것에 의해서만 들어옵니다. 자신을 치료하는 에너지는 타인을 치료하는 것에 의해서만 들어 옵니다. 자신을 아름답게 빛낼 수 있는 에너지는 다른 사람을 아름답게 빛낼 수 있는 것에 의해서만 들어옵니다. 모든 것이 이러한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에너지는 다만 가만히 입다물고 있다고 들어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의식의 근원들은 이 기본 원칙을 깨달은 시점부터 여러가지 체험을 하기 시작합니다. 우주 공간에서 에너지를 도입해감에 따라, 점차 창조의 에너지도 자신 안에 거두어 들이는 것이 가능하게 됩니다. 이 창조의 에너지라고 하는 것은 우주를 만들어 냈을 때 사용된 에너지입니다. 각각의 의식의 근원들은 이 창조의 에너지를 자신의 의식 안에 획득하여,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우주를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체험하려고 하며, 실제로 자신의 범위내에서 스스로 우주를 만들어가기 시작합니다.
의식의 근원은 자신의 의식의 에너지를 사용해, 스스로 우주와 같은 하나의 세계를 완성시킵니다. 스스로 창조주와 같이 행동하며, 자신이 완성시킨 우주 차원 안에서 한층 더 여러가지 의식을 생산하고, 그것을 성장시켜가는 구조를 만들어냅니다. 이 각각의 의식들이 만든 우주 속에서, 여러가지 새로운 의식이 싹트며 성장해 갑니다.
이 의식의 근원이 생산한, 하나의 우주와 같은 커다란 시스템, 이것을 여러분은 지금까지 영혼이라 부르고 있었습니다. 이 영혼으로 불리는 하나의 큰 세계는, 그 의식의 근원이 근본적으로 생산한 하나의 세계입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여러가지 의식이 새롭게 생산되고 있습니다. 이 의식의 근원이 만들어 낸 우주는 그 의식이 생산한 것이고, 진실의 우주와는 꽤 차이가 납니다. 왜냐하면, 의식의 근원이 만들어 낸 우주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창조의 에너지만을 사용해 영혼을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의식이 창조의 에너지를 얼마나 완벽하게 갖추고 있을지는 그 의식의 근원의 능력에 좌우됩니다. 모든 것이 같은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진정한 우주의 창조 에너지와 완전히 같은 창조 에너지를 손에 넣은 의식의 근원은, 아직 이 우주에는 존재하고 있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의식의 근원은 아직 배우는 과정이고, 모든 창조 에너지를 손에 넣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머지 않아서 창조의 에너지를 모두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훌륭하게 성장하여, 창조주와 같은 정도의 능력을 몸에 익힌 것이 됩니다. 여러분의 말로 말하는 상승한 마스터라고 하는 근원은 그 정도에 필적하는 존재이고, 창조 에너지의 완성을 목표로 활동하고 있는 의식입니다.
이 창조의 근원은 자신이 만들어 낸 세계 안에서, 여러가지 체험을 거듭해 갑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종교의 신이라고 부르고 있던 존재들은 모두 이 의식의 근원이 배움의 과정 중에 이 지구에 찾아왔던 것입니다. 창조의 에너지를 가득 활용해, 자신의 우주를 완성시키기 위해서 여러가지 배움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종교의 신도 여러분에게 사랑을 뿌리내리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것이 지금까지의 종교의 신의 한계입니다.
사랑은 지극히 특수한 에너지로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단순하게 사랑한다든가 사랑해 주지 않는다고 하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에너지는 그러한 단순한 말로서는 표현할 수 없습니다. 매우 교묘한 에너지가 되고 있습니다. 가령 자신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현상을 생각해 봅시다. 자신은 다른 사람을 정말로 소중히 생각하여 상대에게 가까이 갑니다. 그 기분이 있는 한, 본인으로부터 상대를 향해 따스한 기분이 흘러 나갑니다. 그러나, 상대가 전혀 거기에 흥미를 나타내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상대에게는 그 생각이 전혀 통해지지 않게 됩니다.
상대에게 준 배려나 온화한 에너지가 영향을 주는 일이 없게 되고, 모처럼 발해진 사랑의 에너지가 전혀 상대에게는 전해지지 않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처음에 배려나 온화한 마음에서 낸 에너지였더라도, 실제로는 사랑이 아니게 됩니다. 우주에서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상대가 받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상대가 받지 않는 것은 우주에서는 사랑이라고 부르고 있지 않습니다. 우주에서는 상대의 몸 안에 들어가는 에너지를 사랑의 성질의 첫번째로서 파악하고 있습니다.
상대의 몸 안에 확실히 비집고 들어가, 상대의 생명을 빛의 방향으로 확실히 가지고 가는 기능을 하는 에너지, 이것을 사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자신이 상대를 생각해 따뜻하게 흘린 에너지라도, 상대가 받지 않으면 그것은 사랑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자신이 배려하는 마음이나, 상대를 위한다는 가치관을 일절 지니지 않고, 다만 어드바이스를 주었다고 합시다. 상대가 그것을 매우 기뻐하여, 자신의 성장을 위해서 그것을 활용했을 경우에, 이것은 우주에서는 훌륭한 사랑의 에너지로 인식됩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사랑을 낸 본인의 관점으로 제멋대로 사랑인가 사랑이 아닌가를 논의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사랑을 주고 있다." "나는 이만큼 사랑하고 있다." 사랑은 사랑을 흘리는 편의 논리로 측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사랑을 받는 쪽이 결정하는 것일까요? 또 다른 의견이 언제나 인간으로부터 나옵니다. "그 사람은 나를 사랑해 주고 있지 않다." "나는 누구로부터도 사랑 받고 있지 않다."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없다." 사랑 받는 쪽으로부터 볼 때에는 항상 이런 말만이 나와지고 있습니다. 이것도 또 우주와는 전혀 다른 견해가 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사랑이라고 느끼든 안 느끼든, 그 사람을 위해서 도움이 되고, 확실히 그 사람을 빛의 방향으로 이끄는 에너지가 그 사람의 몸 안에 흐르게 될 경우, 그것은 사랑입니다. 본인이 사랑이라고 느끼지 않아도, 그것에 따라 눈을 뜨고 깨달아, 확실히 빛을 향해 진행될 경우, 그 사람에게는 사랑의 에너지가 이송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에너지를 내는 쪽의 논리도, 받는 쪽의 논리도 아닙니다. 차라리, 객관적으로 보고 있는 쪽이 그것을 보다 잘 분석할 수 있습니다.
지금 지구인의 인식 레벨에서, 사랑을 올바르게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존재하고 있지 않습니다. 자신이라는 사랑의 당사자가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는 한, 아무래도 자신을 중심으로 보게 되어 버립니다. 사랑을 준다든가, 사랑을 받는다는 표현이 되어 버립니다. 우주로부터 볼 경우에, 실은 이런 용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주는 것도, 받는 것도 아닙니다. 방금 전에 말씀 드린 것처럼, 다른 한쪽으로부터 흘러나와 다른 한쪽으로 들어가는 것, 그리고 그 다른 한쪽을 위해서, 그 다른 한쪽의 성장을 위해서, 확실히 도움이 되는 에너지가 되어 남아 있게 되는, 이런 상황을 사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사랑은 서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준비가 필요합니다. 사랑이라는 말로 논의하는 것보다는, 정말로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지, 그 사람의 성장을 위해서 도움이 되는지, 그 사람이 빛나기 위해서 도움이 되는지를 궁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랑의 에너지는 이와 같이, 하나의 의식체로부터 다른 의식체로 확실히 흘러, 그 의식체 안에 머무르고, 그곳에서 뿌리내려 갑니다. 이렇게 상대 안에 머물러 상대의 성장을 위해서 뿌리내려 가는 에너지, 이것을 총칭해 우리는 사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 사랑의 에너지라는 것은, 그 의식체로부터 발해진 에너지임과 동시에, 이 우주의 어떤 특별한 영역에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에너지를 생산하고, 그것을 관리하고 있는 그룹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에게는 거의 이해될 수 없는 구조가 되고 있습니다. 사랑의 에너지라고 해도, 기본적으로는 하나의 의식체로부터 다른 의식체로 흘러가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을 꼭 기억해 두세요.
의식체로부터 실제로 나오는 사랑의 파동의 종류는, 그 의식마다 미묘하게 차이가 납니다. 어떤 의식은 정말로 상대를 성장시키고자 하는 에너지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어떤 의식은 상대가 훌륭히 빛나는 것을 오로지 생각하며 파동을 내고 있습니다. 어떤 의식은 상대가 스스로 움직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에너지를 열심히 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랑이라고 해도, 그 의식에 따라 각각의 특성이 미묘하게 차이가 납니다. 그렇지만 모두 사랑입니다. 그것은 모두 다릅니다. 그렇지만 사랑이라는, 우주의 커다란 에너지 파동 안에서 공통성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이 모두 어떤 사랑을 몸에 익히고 있습니다. 자신만의 사랑의 파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자꾸자꾸 확대시켜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흘리며, 인종을 넘고, 혹성을 넘고, 생명을 넘어 사랑할 수 있는 에너지로 바꾸어 갑니다. 이것이 성장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사랑의 에너지를 자꾸자꾸 훌륭하게 성장시켜가는 것이 여러분의 역할 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처음 지구에 내려섰을 때, 지구에는 사랑이 거의 발휘될 수 없는 구조가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사랑이 없는 곳에서부터 시작하도록 안배되어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부터, 사랑을 완성시키는 것이 여러분의 역할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사랑을 몸에 익히는 것보다는, 먼저 미움을 몸에 익히고 적대심을 몸에 익혔습니다.
그러나, 사랑과 미움은 어떤 의미로는 같은 파동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움은 확실히 상대에게 전해져, 상대의 진화를 방해합니다. 사랑은 확실히 상대에게 보내져, 상대를 진화시킵니다. 사랑과 미움은 같은 에너지이지만, 서로 극성이 반대되는 것으로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많은 미움을 몸에 익힌 사람은 그와 같은 양의 사랑을 손에 넣을 수가 있습니다. 거의 미움이나 싸우는 마음을 몸에 익히고 있지 않은 사람은, 사랑도 작은 양에 머물러 버립니다.
정말로 상대를 생각하는 기분이 근본에 싹트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미움은 그 나름대로 상대의 것을 꽤 생각하며 발해지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은 정말로 상대의 것을 생각한 다음, 에너지를 흘릴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중의 상당수는 아틀란티스에서, 많은 싸우는 마음을 몸에 익혔습니다. 사랑을 몸에 익히는 것보다, 먼저 싸우는 마음을 몸에 익혔습니다. 그리고 몇번이나 몇번이나 전생을 거듭하여, 조금씩 사랑을 기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부정적인 에너지의 편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사랑의 파동으로 그것을 견딘다고 하는 사람이 아직 이 지구상에는 거의 존재하고 있지 않습니다.
지금부터 지구 인류가 정말로 새로운 시대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우선은 자기 자신의 사랑을 확실히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을 만든다는 것은, 자신이 지금까지 만들어 온 분쟁이나 미움의 파동을 사랑으로 바꾸어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을 미워하는 기분이 있는 사람은 사람을 허락하는 기분으로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한사람 한사람이 그것을 실천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사랑의 에너지를 키우기 위해, 여러분은 일생생활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대부분의 사람은 인간 관계가 매우 피곤하고, 힘든 상황이 되고 있습니다. 사람과 교류하는 것이 귀찮게 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인간끼리의 교류를 무시한 채로 사랑의 성장은 있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인간관계의 고통스러움만을 강조한다면, 상대를 인정하는 것이나 허락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생각을 어떻게든 상대에게 설득시키려고 필사적으로 애쓰고 있습니다. 자신을 인정 받기 위해 기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없다고 우리는 몇번이나 반복해서 말해 왔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은 계속 같은 것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만약 인간 관계에서 불쾌한 생각이나 괴로움, 싫증이 있을 경우, 그것은 자신에게 아직 사랑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사랑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사랑이 없다는 증거일 뿐입니다. 사랑이 없다는 것은 이제 몇번이나 들어, 식상하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되는 것일까요? 어떻게 하면 사랑이 몸에 붙는 것일까요? 거기서 우리는 다시 제일 처음으로 돌아옵니다. 사랑은 어디까지나 상대에게 흘러, 상대의 성장을 위해서 활용될 수 있는 에너지로서 불리고 있습니다.
이런 에너지는 반드시 보편적인 것은 아닙니다. 에너지에 따라 각각 특질이 차이가 납니다. 치유의 에너지는 블록을 없애거나 불필요한 에너지를 제거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반드시 상대를 성장시킨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자비의 에너지도 상대를 감싸주며, 상대가 얼마나 고통스러운가를 이해해 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반드시 상대가 빛으로 나아가게 될지는 알 수 없습니다.
에너지마다 각각 특질이 다릅니다. 사랑은 상대를 성장시키는 것이 전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상대에게 확실히 흐르고 있지 않으면 사랑은 아닙니다. 사랑이 없다고 하는 것은, 결국 자신이 상대에게 에너지를 흘려도, 상대의 성장에 연결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은 상대의 성장을 생각하며 행동하고 있습니까? 상대는 지금 무엇을 필요로 하고 있을까요? 그 사람은 지금 무엇을 배우고 있으며, 지금의 경험을 통해서 무엇을 이해하려 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를 위해 여러분 자신은 어떤 봉사를 할 수 있는 것일까요? 여러분은 일상의 관계에서 이러한 것들을 생각하며, 에너지를 내고 있습니까?
만약 그러한 생각을 한번도 궁리한 적이 없다면, 지금까지 사랑이 없다고 말해져도 당연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없다고 말해지면 불쾌하게 여기고, 자신은 사랑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의 성장에 대한 것은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사랑은 확실히 상대를 성장시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상대가 빛을 향해 스스로 힘차게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엄격한 사랑이라고 누구나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주에서 엄격한 사랑이라는 용어는 존재하고 있지 않습니다. 사랑은 방금 전 말씀 드린 것처럼, 다만 상대의 곳에 흘러 들어가, 상대를 성장시키기 위해서 사용되는 에너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엄격하다든가, 부드럽다는 것은 존재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그 특질로서 예수는 항상 올바름을 전제로 한 에너지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확실히 빛으로 향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었습니다. 확실히 빛을 추구하는 사람은 사랑 그 자체입니다. 엄하다든가 엄하지 않다든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사랑 그것입니다.
만약 빛의 방향을 나타내고 있지 않은 에너지가 주어졌다고 하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아무리 포근하고, 아무리 기분이 좋은 에너지더라도, 그리고 상대가 기뻐하여 눈물을 흘린다 하더라도,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온화한 사랑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우주에서는 그런 용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빛을 목표로 하고 있지 않은 사람은 사랑이 아닙니다. 진화의 방향을 향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장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랑의 에너지를 스스로 확인할 수 있는 에너지를 보내 드립니다. 자신이 어떻게 느끼고 있는 지를, 몸과 마음으로 느껴봐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한사람 한사람이 가지고 있는 사랑의 에너지를 강하게 흘려봅니다...
감사합니다.
사랑에 대해서...
안녕하십니까! 앞서 사랑에 대한 우리들의 견해를 말씀 드렸습니다. 확실히 여러분은 다른 사람을 살린다거나 성장시킨다는 표현을 접할 경우에, 무엇인가 오만하다는 느낌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남을 살린다는 것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에너지입니다. 적어도 다른 사람을 살린다고 할 때에는, 에고는 일체 들어가지 않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살린다는 표현을 취할 때에는, 에고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우선은 그 부분부터 설명해 나가도록 합시다.
다른 사람을 살린다는 것은, 그 사람의 가치관을 정말로 인정하고, 그 사람의 재능을 키워줄 수 있는 올바른 방향성을 이해한 후, 그 사람이 스스로의 장점을 보다 훌륭히 펼칠 수 있도록, 함께 의견을 교환하면서 함께 배워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앞선 메시지를 대한 여러분의 생각을 잠시 살펴보면, 사랑의 에너지를 단지 상대에게 보내는 것으로 이해하신 분이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의미로 사랑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아닙니다. 모두가 함께 배우고, 모두가 함께 이야기하며, 모두가 함께 접하여, 기쁨을 나누는 것이 사랑의 에너지를 전하는 3차원적인 방식입니다. 이것을 배제하고, 단지 사랑의 에너지를 상대에게 보낸다는 이미지를 하더라도, 사랑의 에너지는 전달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살린다는 것은, 이렇게 모두가 함께 공감하며, 함께 기쁨을 느끼고, 함께 이야기하며, 다같이 성장해 가는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거기에 에고는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상대가 필요로 하는 화제를 함께 의논한다, 상대가 필요한 에너지를 취할 수 있도록 함께 여행을 떠난다, 상대가 흥미를 가지는 물건을 얻을 수 있도록, 함께 쇼핑을 간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훌륭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3차원적인 행동에 대한 여러분의 인식이 우리와 상당히 어긋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랑에 대해 의논하면서도, 무엇인가 실제 현실과 괴리되는 듯한 느낌이 전해지는군요.
만약 여러분 자신이 아직도 사랑을 몸에 익히고 있지 않다고 느낄 경우, 사랑이라는 것을 실제 현실에서 어떻게 실천해야 할지 생각해 봅시다. 먼저 여러분의 일상생활의 행동 하나하나를 살펴보고, 그 행동의 동기가 무엇으로부터 비롯된 것인가를 분석합니다. 예를 들면, 책을 살때에도, 물건을 살때에도 근본적인 이유는 어디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인가를 관찰해 봅니다. ‘즐거우니까.' '그것을 가지고 있으면, 기쁘니까!’ 대부분의 경우는 아마 그곳에 도착하겠지요.
그렇다면, 그것을 한층 더 깊게 추궁해 봅시다. 그것을 수중에 넣음으로써 과연 자신은 무엇을 기대하고 있을까요? ‘다른 사람보다 아름답게 될 수 있다. 아름답다고 인정받을 수 있다. 다른 사람보다 많은 능력을 가질 수 있다. 다른 사람보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지식을 가질 수 있다.’ 그러한 것을 바라고 있다면, 그것은 모두 자신의 에고로부터 나온 행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사랑이라는 행동을 취할 경우, 예를 들면 상대와 이야기를 나누거나, 상대에게 무엇인가를 행하거나, 상대에게 무엇인가를 주려할 때, 그 때 여러분은 과연 무엇을 기대하고 있을까요? “나는 사랑이 없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사랑을 주고 싶다", "그 사람이 나의 사랑을 받아 주었으면 좋겠다."," 그 사람에게 나의 사랑이 느껴졌으면 좋겠다…” 만약, 이러한 생각을 발하며 행동하고 있다면, 그것은 벌써 에고의 에너지가 되어 버립니다.
보통 사랑이라는 것은, 그것을 행하고 있을 단계에서, 반드시 이것이 사랑이라는 식으로 의식하지 않을 때가 대부분입니다. 단지 상대가 곤란할 때 ‘어떻게든 해 주자.’, 상대가 비참한 상황에 처해 있을 때 ’어떻게든 도와 주자.’, 상대가 정말로 혼란에 빠져 있을 때 '어떻게든 구해 주자.'..라고 느끼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하나 하나 ‘나는 사랑을 흘려야지.’'나는 사랑을 흘리고 있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렇지만, 바로 그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랑이 없다고 하는 말을 몇번씩이나 들었지만, 그 때문에 사랑을 실천하라는 그 말에 도리어 취해 버리고 있습니다. 다만 상대가 필요로 하는 것을 자신이 도와준다는. 원점으로 돌아와 주세요. 그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상대가 정말로 기쁨을 느꼈다면, “당신 덕분에 인생이 즐겁게 되었습니다.”,”당신의 한마디로 삶의 기쁨이 느껴졌습니다.”,“당신 덕분에 살아 있다는 것이 즐거워졌습니다.”,“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았습니다.” 이렇게 느꼈다면, 그것은 훌륭한 사랑인 것입니다.
자신이 취하는 행동, 하나 하나에 ‘나의 사랑은 이러하다’라고 의식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자신만의 독특한 행동패턴이 있겠지요. 즉,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 친구를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 어투가 정중한 사람, 부드럽고 상냥하게 이야기해 줄 수 있는 사람, 다만 상대를 포옹해 줄 수 있는 사람... 여러가지 타입의 사람이 있습니다. 그에 따라, 상대의 마음을 항상 포근하게 해주고, 살아 있다는 기쁨을 느끼게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한사람 한사람이 발견하고, 길러나가는 것이, 방금전 우리들이 여러분에게 흘린 에너지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그러한 관점을 통하여, 자신 나름의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 한번 숙고해 주시길 바라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